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사도행전 26장 18절『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바울은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에는 존경받는 삶,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셔서 만나주셨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말렉과 그들의 소유를 남겨두었다. 아까웠던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아말렉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은 민족이었다. 아말렉은 육신을 따라 사는 자를 상징한다. 사울이 왕이 되자말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과 싸우라고 했다. 왕의 권세를 준 것은 아말렉과 싸우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왕은 아말렉과 그들의 짐승들을 남겨두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울왕을 떠난 이유였다. 사무엘에게『저자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주지 마라』고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사도바울처럼 선지자 나단을 보내주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강팍하게도 하신다. 주님이 바로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려고 한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구원의 시작은 이 세상이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이 세상은 기업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요한1서에서 나오는『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하시고『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것은 다 아말렉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여기서 『이처럼』이라는 말은『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는데, 백성들이 부르짖자 그 때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만 살게하셨다. 놋뱀을 쳐다보는 자만 살게하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이것이 소경이다. 구원은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다. 소경이 눈을 떠야만 사탄의 권세에 매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부르짖게 된다.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임을 받아야 예수께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다. 그래서 내가 믿기로 결단한다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회개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야만 죄사함을 얻게 된다. 못박히신 예수를 바라보는 자 만이 구원받는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예수가 주가 된다. 예수가 주가 되지 않으면 사탄이 주가 된 자다. 사탄을 따르는 자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자다.
사탄을 따르는 자는 아비가 마귀라고 했다. 육체와 생각의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옛사람이 옛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노아때 심판을 받았던 옛세상, 옛사람은 옛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과 교회는 조화될 수 없다. 주님은『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세상은 나를 미워하지만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는 예수와 연합한 자도 세상이 미워하게 된다.『담대하라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들도 미워하리라 그 때 기뻐하라』라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데, 많은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오순절때 방언하므로 사람들이 교회를 두려워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구별되지 않으면 가짜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과 교회는 하나님과 벨리알처럼 조화될 수 없다. 많은 교회가 세상과 조화되고 있는 오늘날, 내가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 교회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상 이야기하다가 끝나면 교회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주님은『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고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복음은 칼이 된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은『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다. 사람들은『주여 내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예언하였나이다 하리니, 그날에 내가 밝히 말하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나는 너를 몰랐다』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짓지 않은 자는 홍수가 올 때 무너진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평온 할 때는 좋게 보이지만, 홍수가 오면 무너진다. 우리에게 홍수가 무엇인가?
죄짐에 눌려있는 것을 알게된다면 복음에 반응하게 된다.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섞은 것이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복음은 세상을 깨우고,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어두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내가 제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도『너희들은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매일 매일 제사를 드렸지만,『역겨워서 제사를 받을 수 없다』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주님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고 있으신가 궁금하다. 주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찬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예배가 되어야만 한다. 복음이 되어야만 반응하게 된다.
세상의 화평이 아니라 세상에 검이 되어야만 복음이 된다. 예수님은『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얼마나 있는가? 교회 처음 나온 자에게『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위안을 주는 말을 하지, 이런 고통스러운 말을 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회개다. 그렇지 않으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양이 된다.
심판은 반드시 오게되어 있다. 왜냐하면 가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경인 사람들은 심판의 두려움을 깨닫지 못한다. 계시록에서『산들아 나를 덮으라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심판은 일곱번의 대접을 연다. 일곱번의 나팔을 분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것은 구원받을 수 없다.
우상을 지니고 있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지닌 우상이 재물과 가족과 이 세상의 성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모두가 우상이 된다.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게할 만큼 인간들을 진노하시고 있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때 40일 동안 온 땅을 물에 잠기게 하셨다.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심판을 쏟아 부은 것이다. 대낮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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