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는 자들의 모습


시편 24편 6절『이들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더라』 이들은 누구인가? 구원받는 자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2-3절에서『여호와께서는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며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뇨 곧 손이 깨끗하여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 자가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자 외에는 주님의 산(시온산)에 설 수 없게 된다. 이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을 얻게된다. 우리가 의를 쌓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터 의를 얻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얻었다는 말씀이다. 내가 주님을 순종하는지 아닌지는 주님과 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회개하는 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회개하는 자만 순종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예수 안에서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기의 노력과 열심으로 쌓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자는 결국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라면 욥처럼 고통을 주셔서 깨닫게 해 주실지도 모른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밑바닥에는 예수인가 나인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이 오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야 알게된다. 전혀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주님이 그를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을 택하여 믿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주님과 상관없는 자다. 내가 주님을 택하는 자는 당연히 주님이 나를 택하는 줄로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나중에『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이 빛을 비춰주시기 전에는 인간은 자기를 믿을 뿐이다.
왕이 혼인잔치에 초대해도 오지 않았다. 왕이 아들을 보내도 그 아들을 죽여버렸다. 이게 인간들의 상태를 말해준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상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삼년을 같이 살았지만 그들의 내적인 생명은 어두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버렸던 것이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성찬을 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셨지만 다 도망가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기 전에는 아무도 구원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악이 죽어야만 하는 계시다. 그리스도의 계시도 모르면서 다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모르면서 믿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아담과 하와처럼, 숲 속에 숨어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일 뿐이다.
불순종의 아담과 하와는 옛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천사의 불칼을 맞고 죽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양을 죽여서 만든 가죽옷을 항상 입고 있어야만 한다. 가죽옷은 죄를 벗어나는 옷이지만, 죄악의 쇠사슬처럼 항상 짊어져야만 하는 옷이었다. 구원은 이 가죽옷에 대한 두가지 의미를 깨닫는 자만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마찬가지로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을 때 구원을 얻게된다. 앞의 것만 믿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뒤의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죽기 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알게 해 주셨지만 그것 조차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그 만큼 자기가 좋은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이용한다. 자기가 신이 되게 만든다. 스스로 우상숭배하게 만든다. 자기를 믿는 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없다. 산에 오를 수 있는 자는『이들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더라』오늘날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자는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유대교를 믿는 자들도 여호와를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자기들이 스스로 찾는 중이다. 이같이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여호와를 찾을 수 없다.『예수 안』이라는 말은 예수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 죽은 자를 말한다.
구약시대 요시야 왕은 전쟁 중에 사사로운 지혜를 쓰게 된다. 화살을 맞고 죽어버린다. 자기가 타켓이라는 것을 알고 부하와 옷을 바꿔 입는 꾀를 썼다. 그래도 화살에 맞아 죽는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않는다. 여호사밧 왕은 새벽부터 주님을 찾았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이지만 회개하는 자는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다. 여호와의 얼굴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상황에 반응하여 그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오직 주님 만을 구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것이 여호와를 찾는 자요 산에 오를 자다.
주님은 다윗의 시편대로 여호사밧을 구했다. 다윗의 시편이 내게 하시는 말씀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주님을 의지하는가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어 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더욱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어려운 상황은 건강 문제, 재정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 믿음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주를 의지하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을 의지하는가? 그런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달은 자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주님이 우리를 살피셔서 우리의 폐부를 드러내지 않고는 인간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시편의 말씀이 내게 해당되어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육신이 본능적으로 단 것을 삼키고 쓴 것을 뱉는 것 처럼 육에게 좋지 않는 귀절은 다 빼고, 좋은 귀절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아닌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은 누구든지 붙잡을 수 있지만, 자기도 예수처럼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붙잡을 수 있는지? 옛사람인『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 만이 구원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를 아무 생각없이 말하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면 구원은 저만치 가버릴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계시를 깨닫는 자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자다. 세상 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이것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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