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
로마서 6장 7절『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1-2장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3장에서는『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회개하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회개하지 않은 자는 변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육신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인간을 기쁘게 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찾는다. 오늘날 영국 교회는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말했다. 세상과 친구되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 세상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미워하면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례를 설명할 때 잘못된 것을 말한다. repent(회개)가 아니라 repair(수선)를 말하기 때문이다. repent는 씻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은『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나니』예수님의 제자들 만큼 기적을 체험한 자들도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수많은 표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정과 일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올 수 있지만 회개하는 자는 그 문제 속에서 철저히 내가 주인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 외에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능력과 지혜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육은 육이다.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신령한 것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좋고, 세상에 대해서 좋고, 내가 주인인 삶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다. 옛사람도 하나님 말씀 듣기를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죄에서 벗어날수 없다.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옛사람은 육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는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는 것이다.
18세기 청교도인『아더 핑크』의 구원론을 보면, 거짓된 신앙, 거짓된 구원의 확신,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인데,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지금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죽으면 천국간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 구원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회개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들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땅에서는 마음대로 살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동기가 불순하다. 구원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 나는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싶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만이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
거듭난 생명은 예수를 위해 사는 것 만이 기쁨이다. 육신은 영의 생각을 싫어한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서도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려도 예수 안에 있지 않고, 자기를 사는 인생이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다.『아더 핑크』가 말하는 거짓된 복음, 구원의 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수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자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육신이 성령 체험하고, 육신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율법에 비추어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에 은혜받고 싶어한다. 마치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청년과 니고데모와 같은 것이다. 사도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도 성경을 매일 봤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믿는 자를 찾아 다니면서 죽이려고 한 자다.
거듭나지 않으면 옛사람이 매일 매일 예수의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 오늘의 문제는 무엇인가? 세상의 일인가? 아니면 내가 죽지 않은 것을 깨닫고 통회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뿐이다. 회개하면 거듭남을 주신다. 옛사람은 죽고, 내 속에 없는 새생명이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는가 아닌가의 차이는 그리스도가 나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나의 종이 되는가의 차이이다. 왜냐하면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없어져야 만이 그리스도가 나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가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바로 부활을 받아들일 때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온전히 그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
아직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의 보조 역할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죽음에 넘겨져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그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없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와 함께 죽지도 않으면서『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열매를 맺고 생명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는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게 되며 『나』라는 존재를 성화의 길로 이끌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신앙의 형태가 자기 중심, 자기의 의를 쌓는 신앙으로서 마태복음 7장에 불법을 행하는 자이며, 마태복음 25장에『무엇을 하지 않았냐고 항의하는 염소』에 해당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자는 그의 존재가 없어진 자로서, 열매와 새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에 항상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며, 날마다 죽는 것이다.『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예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는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양의 모습이며,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닌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될 것이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죄에 대해서 죽어야만 한다.『죄에 대해서 죽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에 대해서 계속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6장 12-14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자신이 은혜 아래 있는 자라고 생각되면 자신을 죄에게 내주지 말아야 한다. 죄에게 내어주는 자는 스스로 은혜 아래 있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사탄의 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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