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6장 13-14절『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것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에 있는 자다. 애굽을 나올 때는 바로왕을 벗어난 것이다. 애굽을 나온 것은 세상에 대해서 내가 못박힌 것이다. 광야에서는 애굽이 더 좋다. 회개의 복음은 애굽에서는 전파가 안된다. 광야에서 전파되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나온 적도 없으면서 교회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교회 밖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오늘날 성공의 기준은 세상이다. 재물을 얻고 자식들 성공하고, 가정이 평안한 것이 세상의 원리이지만 교회에서도 적용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세상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세상과 벗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맺는 일』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바로왕은『애굽에서 예배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적어도 사흘 길이상이 떨어져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완전히 죽어서 장사되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이 네가지 밭의 비유가 된다.
네가지 밭의 비유는 세상의 왕인 사탄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보여준다. 새(마귀)가 와서 말씀을 쪼아 먹는 길가 밭,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때 핍박을 받아 넘어지는 돌짝 밭,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넘어지는 가시떨기 밭의 비유다. 아무리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고 말해도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육신으로는 기쁜 것이다. 육신은 세상에서 적합하지 천국에는 적합하지 않은 존재다. 이 세가지 밭은 회개하지 않은 밭이다. 예수님이 네가지 밭의 비유를 하시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을 인용하신다.『저희가 눈으로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들어도 알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미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바벨론에게 끌려가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렸다.『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고 말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톱으로 잘라 죽여버렸다. 우리도 이사야 시대에 살았더라면 주님이 보시기에 세가지의 밭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신 말씀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로마서 3장 19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이게 복음이다. 이게 모든 사람의 영적 실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육체와 육으로 비롯된 생각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을 말씀해주시고『놋뱀을 매달았으니 그 놋뱀을 쳐다본즉 살리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사랑 앞에 진리를 생략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먼저다. 진리의 사랑이다. 진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애굽을 사랑한다. 애굽을 사랑하는 자가 바로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내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가나안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다. 그러나 열정탐꾼은『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했다. 약속을 잊어버렸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세상의 어떤 상황이 나타나면『저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죽는다』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매일 매일 성경을 들어면서도 세상에 반응하고 세상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열정탐꾼의 말에 반응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회개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세상에 반응하면 그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개는 말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주여 내가 평생 등불을 켰나이다』라고 말해도 주님은『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많은 교회는 주님이 주신 것이 모자라서 세상 등불로 켜진 곳이 많을 것이다.
롯의 처를 비유한 것은『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어긴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출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어야 하는 회개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전적타락의 모습이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롯의 처』처럼 될 것이다. 구원은 요단강을 건너 예수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여기에서『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오직『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옛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6장 15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거듭난 자를 말한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백세에 아브라함이 자기 안에 없는 생명을 받는 것이다. 이삭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스스로 신약시대의 교회라고 하면서 구약시대를 살고 있다. 거듭나지도 않으면서 구원받았다고 한다. 율법에 갇혀있으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한다. 회개하여 믿음이 오기 전에는 다 갇혀있는 존재다.
회개해야 거듭나고, 거듭나야만 생명책에 기록된다. 거듭나는 것이 바로 성화다. 세상에서 열심히 잘 해보려고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는 것이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 성화요 거듭나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다 소경이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8장 4절에서 말하는 것이 요구된다.『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여기서 『율법의 요구』는 헬라어『디카이오마(명사)』다. 죄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옳은 행실』의 단어와 같다. 예수 안에 있어야만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들은『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이제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 지키는 것이 아니라,『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율법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여전히 계명을 어기는지 살피면서 살아가는 자는 율법에서 벗어난 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에 대해서 육신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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