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힘입어 쫒아내느냐
누가복음 11장 23-24절『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을 쫒아내었더니 사람들이 오히려 15절에서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비방했다.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무당들이 하는 일이다. 무당들은 자기에게 있는 더 센 귀신들을 들어가게 하므로 작은 귀신들을 쫒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무당처럼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귀신을 쫒아냈다.
여기에서『힘입어』라는 말이 나온다. 헬라어로는『안에 있다』는 뜻이다.『하나님의 손 안에서 쫒아냈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명하시고 역사하셨다는 말이『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는 것은『너희들 위에 임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말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누가복음 12장 4-5절을 말씀하셨다.『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주님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는 지옥으로 가는 자들에 대한 글이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두려워하는 자가 가장 먼저 지옥으로 간다. 요한계시록은 율법서가 아니다. 복음의 연장이다. 구원받는 자는 7절에서『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이기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믿는 자다.
구약의 모든 전쟁에서 히브리 백성의 수가 적었다. 전쟁을 나가는데, 숫자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빼라는 것이다. 약혼식을 했는데 결혼식을 못한 자, 집을 지었는데 살지 못한 자를 빼라는 것이다. 주님은 전쟁 중에서도 숫자를 빼라는 것이다. 모세오경에서 무기의 숫자를 세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믿음은『평강이 있다 없다』라고 하는 마음 상태가 아니다.
믿음은 주님 만 바라보는 것이다. 불뱀에 물려도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고 구원이다. 그 결과로 평안이 온다. 삼만 이천명을 모은 기드온에게『이렇게 많은 군대가 나가서 이기면 너희가 나가서 이겼다 할 것이다.』그리고 숫자를 빼겠다고 하면서 모세오경의 법칙을 말씀하셨다.『두려워하는 자는 스스로 나가라』고 말씀하시니, 이만 이천명이 돌아갔다. 두려워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또『빼겠다』고 하셨다.『칼 쓰는 자세가 아니라 물먹는 자세를 보고 빼겠다』고 하셨다.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의 현장에서도 자세를 보는 것이다. 허겁지겁 물을 먹는 것인지, 물을 먹을 때도 생각하면서 물을 움켜먹는 것인지 자세를 보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구원은 예수의 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서『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구원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야만 한다. 기록되지 못한 자는 짐승에게 경배하게 되어 있다.
계시록 13장 9-10절에서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자칫『참아야 되는구나』라고 율법처럼 느껴진다. 회개없이 믿으려 하면 율법에 빠질 수 있다. 회개없는 믿음은 율법의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계명을 생각하면서『잘 지켜야하는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회개를 말씀하신다. 주님은 회개를 통하여 행위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는 다 우상에게 절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계시록 3장 4절에서『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사데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는 자가 몇 명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1절에서『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믿음을 아노니』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믿음을 보시지 않고 믿음의 결과인 행위를 보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행위를 율법의 행위로 생각한다. 마틴 루터가 고민한 것이『행위로 구원받는가? 믿음으로 구원받는가?』였다. 그것은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이다. 구원은『행위냐 믿음이냐』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냐 율법의 행위냐』이다.
계시록 3장 5절에서『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이게 구원이다. 이기는 자가 흰옷을 입는다. 출애굽기 6-7장에서 주님은『나의 군대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 순서에도 성경은 영감이 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이리들 가운데 양 같도다』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주님은『노력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도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래서『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것이다.『뱀처럼 지혜롭고』에서 뱀은 인간을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래서 잠언에서 지혜는 순종이다. 하와는 눈에 본 판단 대로 행한 것이다. 그녀가 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놓친 것이다. 들은 대로 행해야만 한다. 하와는 본 대로 행했다.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이 순종이다. 열정탐꾼도 본대로 판단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은 대로 판단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순결하게 해 주신다. 이것이 바로 성화다.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래서 흰옷을 입혀주신다. 그래서 성화되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예수가 주인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어주시고 흰옷을 입혀주신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는『사람들이 교회 나오자 말자, 죄를 고백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선포한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다 거짓이다. 아브라함도 완전한 순종에는 25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었다. 누구에게 달려있는가? 내가 노력하고 내가 살아있는 한 순종할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 만이 순종할 수 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나의 노력, 나의 판단, 나의 성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회개요, 의롭게 되는 길이다. 회개는 자아가 죽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세상 사랑하는 마음이 죽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죽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매주 교회에 나와서 용서만 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데, 인간들은 모르고 거절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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