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히브리서 4장 1-2절『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구원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애굽을 나오는 것이 아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회개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오늘날 회개의 의미를 모르고 산다면 자기가 주인이고 율법에 따라 살 뿐이다. 회개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회개의 말씀에 반응한다면 구원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신다. 십자가의 도는 회개하는 자 외에는 붙잡을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으로 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자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갔다.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제자들처럼 다 도망갔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율법 아래 살고 있으면서, 은혜 아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매일 맛나를 먹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를 받았지만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많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구원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속에서 결정된다. 오늘날 우리도 구약시대와 같이 복음 전함을 받았지만 들어도, 믿음을 화합지 않으면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믿음이 화합된다는 말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약속을 화합하는 그 믿음이다. 그 이야기가 민수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민수기는 홍해바다를 건넌지 1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고, 유월절에는 어린양의 피를 칠하는 것과 내가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세상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유월절을 지킨 다음에 성막을 통해서 하늘의 모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땅이 갈라져 불이 혀같이 갈라져 250명이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도 경험하고 지옥도 경험했다. 그래도 열두 정탐꾼을 통해서 옛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는 신약시대 열두 제자의 이야기다. 옛사람은 약속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열두 정탐꾼은 지파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가장 믿음이 좋고 믿을만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라고 말했지만, 열명은『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그 곳에는 아낙자손(거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육십만명이 열명의 정탐꾼의 말을 믿고 통곡하고 밤새도록 울었다. 이게 옛사람이다. 우리가 그 당시 살았더라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율법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열정탐꾼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 된다. 옛사람은 육적인 생각이다. 육적인 생각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나의 정체성이 육을 따르는가 성령을 따르는가? 그 기준은 옛사람이 죽었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성화되어서 육의 마음을 이기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육신의 생각을 바로 잡고 고쳐서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만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반성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육신의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이 죽는 것이 회개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수 없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2000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진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옛사람이 죽을 때 그 다음에는 성령님이 모든 것을 이끌어주신다. 로마서 8장 9절에서『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은 자는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게 된다. 로마서 8장 4절에서『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육적 옛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다. 양자가 된 사람(새사람)은 법적으로 이전의 아비와는 관계가 단절된다. 이전의 아비(옛사람:마귀의 자식)를 부정해야만 한다. 옛사람은 사망의 법이 적용되지만, 새사람은 성령의 법이 적용된다. 내 속에는 두 마음의 법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나』라는 정체성은 어느 법을 따를 것인가?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살 수 있다. 옛사람이 죽는 것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성령의 법을 따르게 된다. 로마서 6장 17-18절에서『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회개는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절에서『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죄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 새생명을 얻고, 그 아들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오늘날은 예수의 피로 죄를 씻는 것만 강조함으로서, 죄에 대하여 죽는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죄에 대하여 죽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먼저 예수의 피값으로 사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 예수의 피로 죄를 씻어주시는 것이다.
예수의 피값으로 사는 것은 구약시대 성막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성막에 들어가면 놋제단을 통과해야 한다. 놋제단은 씻는 곳이 아니라 제물이 죽는 곳이다. 그 곳은 불이 있다. 그 불은 죽음으로서 지옥의 불을 상징한다. 놋제단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 내가 함께 죽는 것이다. 내 대신 죽는 양이 곧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양과 내가 함께 죽는 것이다. 그 양과 연합되어 죽는 것 만이 유효한 죽음이다. 죽은 양과 내가 별개의 존재가 되면 그 죽음은 유효하지 못한 것이다. 레위기에서『죄를 속한 즉 사함을 받으리라』 라고 했다. 속해야 사함을 받는다. 이 말의 뜻은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놋제단을 통과하면 물 대야가 나온다. 그 곳에서 씻어주시는 것이다. 속해야만 죄를 씻게 된다. 놋제단에서 속한 즉 물대야에서 씻음을 받는다. 오늘날 대부분 놋제단을 건너뛰고 죄를 용서받기만 하려고 한다. 불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제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오늘날도 죄에 대해서 죽지 않고, 죄용서만 받으려고 한다면 예수님은『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이다.
놋제단은 회개다. 그리고 물대야는 믿음을 의미한다. 놋제단, 성막, 성소, 지성소, 법궤도 치수가 있다. 그러나 물대야는 치수가 없다. 어린양과 함께 죽은 자에게 주님의 죄 용서는 무제한을 의미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린양과 함께 죽으려고 하지 않고, 무제한의 죄 용서만 노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짜 복음에 속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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