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은『아멘』이라고, 그렇게 주장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병이 났을 때,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주님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도 병이 고쳐지지 않는 것을 본다. 확신이 믿음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병이 낫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이 병을 치유해 주실 것보다 먼저가 되면 낫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도 낫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병이 악화되고, 우리가 쌓은 믿음이 병의 악화와 함께 무너지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완전히 무너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붙잡을 때 역사한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을 쌓으려고 한다. 그런 내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으려고 한다. 회개하는 자는 내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에 절망하게 된다. 내 속에서는 믿음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행함이 없게 된다. 내 속이 모랫바닥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모랫바닥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집을 지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어리섞은 것이다. 바닥이 모래인줄도 모르면서 믿음을 쌓으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같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마태복음 7장 2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는 말이다.
회개없이는 믿음을 이룰 수 없다. 내 속의 죄성을 처절하게 깨닫지 않고는 예수는 소망이 될 수 없다. 마틴루터는『아무리 주님 안에서 기쁨을 취하고, 영적 체험을 해도 자기의 무능력함을 좌절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믿지 말라』고 했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전적타락이다. 항상 내가 먼저다. 이게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항상 나 밖에 모르는 것이다. 주님이 베드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신다. 베드로가 안되면 우리도 안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가족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삼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예수님이 눈 앞에 있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고, 매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들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이 땅에 내려와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이 정도되면 믿음이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다 믿었지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죽으러 왔다 그리고 제 삼일에 살아난다』는 말씀은 이해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후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에 반응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베드로가『그리마옵소서 결단코 그 일이 당신에게 미쳐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사탄아 물러나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대속물로 오셨다는 것을 먼저 들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에는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채로 이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게 회개없는 복음을 듣는 것이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하늘에서 음성을 들었지만, 자신의 내면의 타락성때문에 괴로워했다. 영국의 왕실 목사였던 존 오웬의 간증을 보면, 그는 죄짐이 무거워서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즉시 받는다. 그러나 믿음은 회개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믿음의 즉시성만 강조한다. 단번에 얻는 믿음을 위해서는 바닥을 파헤쳐야만 한다. 바닥을 파서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나올 때까지 계속 파야만 한다. 회개가 없는 사람은 밑이 모래인데 쌓기만 하려고 한다. 예레미야는『주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는 파괴하고 부수며 멸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우기 위하여 나를 불렀노라』라고 말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회개하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고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죄에 대하여 죽고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병 낫는 믿음도 안되고, 기도 응답받는 믿음도 안된다. 거의 대부분 마귀에게 거짓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열정탐꾼처럼 속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베드로도『그리마옵소서』예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로 다가 갈 수 없게 된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그런데,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이해가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되지 열심히 찾으면 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간절히 찾으면 만나리라』라는 귀절도 있다. 성경에는 상반되는 듯한 귀절이 너무 많다. 믿음과 회개는 반대다. 회개는 버리는 것이고, 믿음은 붙잡는 것이다. 회개는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고,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 정 반대다. 그런데 많은 경우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버린 적도 없고, 내가 소경이었다고 깨닫는 것도 없고, 그냥 믿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을 보면 철저히 내가 주인인 것이다. 그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그래서 나는 죽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믿고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대부분 예수와 함께 못박히지도 않으면서 그냥 믿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서는『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키므로서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다 율법주의자들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내 속에 선한 것이 조금은 남아있다고 생각하므로, 성경을 보고 뭔가를 할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헐은 것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모양이다. 주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된다.
죄가 인간의 주인이다. 죄를 지으면 마귀의 종이 된다. 율법은 남편이다. 남편은 절대 죽지 않는다. 단 하나 내가 죽어야만 율법에서 벗어난다. 이것을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먼저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죽은 예수와 연합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종류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 이것이 회개다.『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이게 회개고, 칭의고, 성화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자기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남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만 한다. 남의 죄를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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