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성탄은 고통이었다
누가복음 2장 7절『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예수님은 육신의 동생들도 있었다. 예수님 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그런데 구유에 뉘었다. 왜냐하면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첫번째의 성탄은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었다. 오늘날 성탄절은 축제 분위기다. 성탄의 주인이 누구인가 알 수 없을 정도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동방박사는 예수님 만을 경배했다. 성탄절은 예수님 만을 경배하는 날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예수는 여관에 누울 곳이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났던 분이시다. 그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예수였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예수가 된다.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에 호적 등록하러 왔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 날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의 출생 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첫번째의 성탄은 아무도 영접하지 않은 예수였다. 또한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출생할 때,『어느 집으로 가라』라는 등의 상황을 계시하시지 않으셨다.
베들레헴의 첫성탄은 축제가 아니라 비극이었다. 헤롯이 세살 아래 모든 사내 아이를 다 죽였다. 모세가 태어날 때, 모세가 유대민족의 구원자임을 마귀가 알고, 바로왕을 시켜서 아기 때부터 사내 아이를 다 죽인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때 마귀가 알았으며, 헤롯왕을 시켜서 그렇게 죽인 것이다. 세계의 역사상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첫성탄은 통곡 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리아에게도 불안하고 고통의 날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날이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그래서 성탄절을 통해서 그 분의 뜻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잉태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born again(거듭남)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탄의 의미는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 안에 성령이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 만이 구원이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회개하는 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받는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회개하지 않은 자는 있을 수 있지만, 회개는 했는데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이다.
구약성경에서 회개를 가장 길게 설명한 부분이 욥기일 것이다. 욥은 열정탐꾼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잘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자식이 다 죽는 슬픔을 주셨다. 사업도 다 망하는 괴로움도 주셨다. 몸에 피부병이 생겨서 괴로워했다. 오늘날 우리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괴로움이 있을 수 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능력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회개하여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오면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죽으러 왔는지를 깨닫는 자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는 예수의 십자가와 더불어 못박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이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된 내용이다. 예수의 영어 이름은 Jesus다. 약 500여년 전의 알파벳에서는 J가 없었다. J는 라틴어에서 출발한다. 1511년 전의 영어성경에는 Yesus였다. 그런데 카톨릭에 의해서 라틴어의 J가 영어에 들어와서 Jesus가 된 것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말할 때는 히브리어로 말했을 것이다. 예수의 히브리어는 여호수아다.
유대인들은 홍해바다를 건넌 모세를 기억하지만,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는 별로 기억하지 않는다.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오늘날 대부분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고 생각한다.
레위기 16장 8-10절에서『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두염소 중에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드려지는 염소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구원을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산 염소 한마리의 머리에 아론이 두 손으로 안수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내는 아사셀의 의식은 욤키프의 대속죄일에 자유를 주어서 마음대로 가게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 옛것이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거듭나는 자는 영원히 천국에서 자유를 갖게된다.
이스라엘 역사책에 따르면 욤키프르(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1년 중에 한번 7월10일에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아바(아버지)라고 부른다. 살아야 할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붉은 색의 리본을 묶는데, 이 때 붉은 색의 리본이 흰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흰색으로 변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가 붉을지라도 양털처럼희게 하실 분이시다. 죽어마땅한 염소 같은 자라도 자기부인의 회개하는 자를 어린양처럼 되게 하실 것이다. 피흘리심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를 위해서 피흘려서 죽어러 왔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이다.
이사야서 9장 4절에서『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주님은 미디안을 미워하셨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미디안을 이기게 해 주셨다. 주님은 사탄에게서 회개하는 자를 건져주시기 위해 기드온의 300용사와 함께 싸우신 것 처럼 싸우시겠다는 표현이시다.
9장 5-6절에서『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는 5-6절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만 부각시킨다. 이 아기가 5절에서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은 별로 관심이 없다.『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를 사탄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피 묻은 옷이 전쟁터처럼 되게 싸우는 것이다. 구원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누가 말했는가? 그래서 불에 짚이 다 타버리듯이, 예수님은 기꺼이 죽으시고 회개하는 자의 죄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정결케 만드신다. 우리에게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면 안되는 이유다.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의 불시험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만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럴 때 주님이 욥에게 주신 선물이 있다. 욥은『내가 전에는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주를 눈으로 보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회개하나이다 다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 만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다. 욥이 받은 축복은 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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