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신명기 7장 1절『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가나안에서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가나안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상징한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아낙자손과 싸워이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자아와 싸워이기는 자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바로 마귀와 연합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마귀와 싸워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순종이다.  7장 2절에서『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오늘날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홍해바다를 걷는 것일 것이다. 우편강도나 빌립보 간수처럼 죽음 앞에서 주님께 굴복하여 자기 부인의 회개하는 자는 드물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서 주님이 지시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삭이라는 새생명을 얻을 때까지 25년을 방황했다. 그 긴 기간이 순종으로 인한 주인이 바뀌는 기간이었다. 어떤 사람은 25년, 어떤 사람은 우편 강도처럼 6시간 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여 예수님께 붙잡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부서짐에 달려있는 것이다. 야곱은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다.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여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넌 것처럼, 야곱은 엄마가 준, 형 에서의 옷을 의지하여 축복 기도를 받는다. 이것이 약속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으로 부터 빠져나왔다. 라반 집에 도망하여 20년 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내가 너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다. 얍복강에서 경험한 것은 환도뼈의 부서짐이었다. 그 곳이 바로 야곱에게는 가나안의 입구인 것이다. 야곱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낙자손의 7족속이 있는 가나안 땅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 우리도 아낙자손과 같은 내속의 마귀를 이길 힘은 없다. 오직 주님이 동행해 주실 때 이기는 것이다. 주님께 복종할 때 가능한 일이다. 가나안은『복종하다』라는 동사에서 어근을 찾을 수 있다. 고린도후서 10장 6절에서『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여기에 나오는 복종이 카나안이라는 말이다. 주님을 따를 때 나타나는 장애물을 주님이 해결하신다. 주님이 가나안 땅에 앞서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가 의지하는 육신적인 힘이 부숴져야만 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한 일이다. 부숴짐과 복종은 같은 말이다. 주님께 복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이 부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광야를 지나는 것이 회개의 기회다. 회개는 낮아지고 부숴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애굽을 나올 때의 히브리 백성은 아버지 집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야곱과 같은 모습이다. 자신들은 준비가 안되었지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이다. 야곱의 광야생활은 20년간의 라반의 집이었다. 라반의 육적인 행동으로부터 야곱도 육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셔서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야곱 개인의 삶이나 히브리 백성의 여정은 오늘날 우리 신앙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고싶어 하신다.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알고자 하신다. 신명기 1장 36절에서『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여기서『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은 복종이 충만하다는 뜻이다. 갈렙의 마음 안에는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 만이 가득차 있다는 말이다. 이 땅에 살고있는 동안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을 만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일 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 순종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와 붙어있다. 회개는 했는데, 순종이 안된다고 하는 사람은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마치 주님의 사랑과 의가 분리가 안되는 것처럼, 회개와 순종은 분리가 안된다. 사랑과 의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주님 안에 완전하게 다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의를 얻는다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사랑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회개하는 자는 반드시 순종하게 된다.
순종하지 못하면서 회개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주인인 삶은 회개하지 못한 결과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보면 알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모든 문제에 대해서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약한 자를 택하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다. 야곱처럼 강한 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20년간 속이는 자 라반 집에서 다 뺏기고 부숴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회개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사람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광야생활처럼 내 마음대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인 순간 내 뜻대로 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광야 40년 동안 낮추게 하시고 시험하신다. 시험하시는 이유는 복종하는지 안하는지 그 마음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40년이 지나서 주님이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신명기 7장 1절『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애굽, 광야는 구원이 아니라 단지 기회를 얻는 것에 불과하다. 광야에서는 40년간 회개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회개의 완성는 옛사람은 죽고, 새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게 구원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육신적인 방법으로 취한 롯, 혈통으로 말미암은 이스마엘, 자기 뜻으로 세운 고향 사람 엘리에셀, 그 세가지가 다 회개하게 되고,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난 자 이삭 만이 거듭남이다.
광야에서 우리 옛사람이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환도뼈가 부숴져야만 한다. 이 복종이 온전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욥에게는 자식이 죽는 슬픔과 재산이 다 없어지는 괴로움과 온몸에 악창이 나서 온몸을 긁어야 하는 슬픔 속에서 주님이 욥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다. 그래서 욥은 마지막 장에서 『내가 주님을 눈으로 보나이다.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내가 이제 나를 미워하고 회개하나이다』 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욥의 복종이 온전하게 된 것이다.
시편 150편에서 다윗이 그를 미워하고 견제하는 사울을 통하여,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통하여, 회개하고 변화받고 부숴지는 모양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나 무리들 가운데 있을 때라도 명령에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는 주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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