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한복음 13장 36-37절『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삼년간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였다. 직장과 가족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믿음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져만 갔는데,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적 변화가 없으면 이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내적 변화는 없다. 이게 주님의 기준이 된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회개없이는 거듭남이 없다.
풍랑 위에 주님이 서 계셨을 때도 물위를 따랐던 베드로였다. 그런데 주님은『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변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내적변화는 육적 속성이 죽는 것을 말한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비롯된다. 그래서 그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다가와야만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만이 구원이 된다. 예수님은『나는 죽으러 왔다 대속물로 죽었다가 제 삼일에 살아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믿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기적을 보고 말씀을 배우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생각이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지금은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때 두가지의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주님을 따를 수 없는 존재이군요』그리고『아니요 내 목숨을 다해서 따르겠나이다』지금 우리는 어느 쪽인가? 뒤의 것을 선택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주인인 셈이다. 그러나 앞의 것을 받아드리는 사람은『자기』라는 존재에 대해서 깨닫고 있는 셈이다.
『자기』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자기』라는 존재는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귀신을 쫒고 능력을 행하고 예언하기를 좋아하는 존재다.『능력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나는 너를 몰랐었다』고 말씀하셨다. 열두제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나타내었다. 그런데도 가롯유다는 돈을 훔쳤다.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 말씀보다 더 재물에 의지하는 자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 주머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재물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전반부에서 하시는 말씀은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회개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이 아는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자 뿐이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 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너의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라고 명령하셨다.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경외하다』는 말은『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순종의 의미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먼저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회개하지 않는다.
욥은 악을 떠난 자다. 생일 잔치를 했을 때도 자식들이 잔치 때 죄를 지었을까봐 제사를 드린 자였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사탄의 송사를 받으셔서 욥의 자식이 다 죽고 사업이 다 망하고, 몸에는 병이 나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일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사단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욥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 것이다. 욥은『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회개를 확인하시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였는가?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회개하는 자는 주님 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한 자가 구원받는다. 회개해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선물로 주신다.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사는 거듭난 자에게 임하신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되는 것이다.
욥기의 전체 이야기는 회개하는 말씀이다. 마지막에는 회개한 욥에게 모든 삶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회복되는 삶이 거듭난 삶이다. 이 세상에 살다가 보면 실패와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회개하면 삶의 고통 속에서 거듭난 자에게 삶의 회복을 더하게 해 주신다. 주님은 거듭난 자를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에게 삶의 회복을 더해 주신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난도 주시지만 회복도 주신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자는 주님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능력만을 구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았다. 로마서 1장 28-31절에서 말하고 있다.『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성경의 대부분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닌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삼년간 주님을 따랐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사람들도 믿기는 믿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 믿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르되『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하는 이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의 핵심은 누가 주체인가다. 나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이신가? 우리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들어가야만 구원받는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자가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간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대속하여 죽었다고 믿고 있지만, 예수 안에 없으면 다 거짓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는 모든 사람은 주님에게는 거짓말쟁이다. 베드로가 주님에게『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거짓말 했듯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주님에게 거짓말한 좋은 사례가 열정탐꾼의 말일 것이다. 주님은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열정탐꾼은 백성들에게『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다. 들어가면 죽는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옛뱀은 속이는 자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옛뱀에 속하는 자이기 때문에 주님께 다 속이는 자다. 거듭나지 않으면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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