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을 나왔으나 광야에서 멸망한 이들(2)


노아의 시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진노하셔서 물에서 죽게 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탕자의 비유는『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탕자의 비유는『탕자가 아버지를 버렸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하나님께 다 달라고 요구하는 존재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게 포도원의 비유다. 소출(회개의 열매)을 달라고 선지자들을 보냈는데, 그 종(선지자)들을 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들을 보냈는데,『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우리 것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아들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아들을 죽이는 자가 된다. 많은 교회 안에서 회개의 열매도 없으면서 매일 죄를 반성하고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자들은 아들을 죽이는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계시되기 전까지는 전적타락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기뻐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자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기쁜 것이다. 회개한 자만 순종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반석에서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신령한 음료는 성령이시다. 성령을 체험해도, 자기부인의 회개없이는 다 구원받지 못한다.『매일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로 부터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라고 말해도, 자기부인의 회개없이는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10장 5절에서『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유다서, 히브리서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애굽을 나오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애굽을 나와 광야로 나가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얻는 과정에 불과하다. 광야에서『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사도바울은 삼층천에 갔다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엄중히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예에서 영원한 약속은 두번째 주어진다.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마지막 비유다. 15장에서 앞의 두가지 비유가 있는데,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동전의 비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도 엄밀히 말해서 잃어버린 목자의 비유라고 해야한다. 목자가 양을 잃어버리면 목자가 회개해야 한다. 목자 책임이다. 그러나 양들이 목자를 버리고 마음대로 떠나간 것이다. 그래서『이와 같이 회개하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떠나간 양들에게 회개하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두번째는 잃어버린 동전의 이야기다. 여자가 등불을 켜서 동전을 찾는 이야기다. 상황은 밤을 나타낸다. 첫번째 비유(잃어버린 어린양)는 낮이다. 첫번째 비유는 허물로 죽은 자를 나타낸다. 인간이 지은 죄로 목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두번째의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은 움직이지 못한다. 첫째와 두번째 비유는 허물과 죄(악)로 죽어있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는 자라는 것이다. 죽은 자는 살아나야만 한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세가지 비유는 사도바울의 서신과 같은 맥락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하는 그 죽어있는 자의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두번째 비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살아나야만 한다. 이 일이 요단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요단강은 애굽을 나온 옛사람이 죽은 곳이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 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다. 거듭난 자(다시 태어난 새사람)만 구원받는다. 거듭난 자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광야에서 멸망당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 애써서 구원의 확신을 주려고 한다. 세상으로 부터 떨어질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하는 것 뿐이다.
요한복음 16정 30-31절『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0절에서 많은 교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나 31절에서 예수님이『나를 믿는다고?』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32절에서는『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이 말씀은 가롯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나를 믿는다고?』라고 말한 성경 번역에는 차이가 있다. "You believe at last!" Jesus answered.(NIV) Jesus answered them, Do ye now believe?(KJV) KJV는 500여년 전에 번역한 영국의 번역본이고, NIV는 백년전에 번역한 미국의 번역본이다. NIV는『이제야 드디어 믿는구나』라고 칭찬했다. 칭찬한 후에『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말하는 것이 앞 뒤 문맥이 맞는 것인가? 이 말씀은 탕자의 비유와 같은 말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이제는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말한다. 앞의 비유(잃어버린 양, 동전)는 회개라는 말이 나오지만, 탕자의 비유는 회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죽었다가 거듭난 자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허물(세상죄)에 대한 회개를 말한다. 두번째 동전에 대한 비유는 죄(원죄:악)에 대한 회개를 뜻한다. 허물은 고백하므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악(원죄)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처럼, 죽어야만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삼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기적을 경험하고 체험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열한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믿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를 믿는 것이다. 기도를 응답하시고, 함께 계셔주시고, 말씀을 전해주시는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믿는다고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죽어있는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는 자가 된다. 요한복음13장 37-38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푸시케:혼)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헬라어 never가 빠져있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과 16장 사이에서 길게 성령에 대해서 설교를 하셨다.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감동을 얻고, 성령을 체험하고, 기적을 경험해도, 자기부인의 회개가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믿음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가 있으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다.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한다. 내가 살아있는 예수와 연합되는가?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자가 없다. 다 예수를 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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