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의 뜻은『장막을 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 성막이 완성된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주의 영광이 거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이 장막을 쳐서 육신가운데 거하실 때에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있게 된다. 죄인은 그 분을 직접 만날 수 없다.『성막에 가까이 오는 자는 죽을지니라』라고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말씀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갈 때도 그러했다.『백성도 짐승도 올라오면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받아오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모세에게 말했다. 주님은 돌판을 모세에게 맡긴 다음에 하늘의 식양대로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그래서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올 때가 오순절이었다. 그 돌판을 모세가 손에 들었다. 그 때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므로 수건으로 얼굴가렸다. 성막의 휘장을 암시한다. 성막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휘장으로 가려져 있다. 그 곳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에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성막이 완성되자 말자 주님의 영광이 거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장막을 치셨다. 장막을 치신 그 분이 바로 성전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백성들은 성막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양을 가지고 와 그 제물을 죽여서 장막 안에 계신 그 분과 교제하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은 출애굽기, 레위기에 장막을 친 것과 같은 것이다. 성전의 장막이 바로 주님이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거하실 때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성소 안에 들어가면 놋제단과 물대야가 있다. 놋제단은 죽이는 곳이다. 죽을 제물에 안수하는데, 죽을 제물과 연합되는 것이다. 놋제단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모든 제사의 시작은 죽음이다. 죽은 제물과 연합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죄가 전가되는 것이다. 제물의 죽음이 제물을 가지고 온 죄인의 죽음이 되는 것이다. 그 후에 물대야에 가게 된다.

물대야는 씻음이다. 놋제단과 물대야 사이에서 예수와 죽는 자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 죽을 제물과 연합되어서 예수와 함께 죽는다면 제사장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씻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는데, 물 대야에서 씻지 않는 자는 죽게 된다. 씻은 후에는 성소 안에 들어가게 된다. 성소에 들어가면 금촛대와 진설병이 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내려오신 돌판이 있다. 법궤 안에 있는 돌판은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셨다. 돌판은 하나님의 강림하신 발과 같다. 법궤를 열어도 안되고 만져도 안된다. 법궤를 움직일 때는 어깨에 매어야만 한다.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다. 시은소라고 하는데, 은혜를 주는 보좌라고 한다. 법궤 안에는 율법의 말씀이 들어있으나 그 위에는 은혜를 주는 보좌가 있다. 속죄소는 죄를 씻는 의미가 아니라, 구속(속량)을 의미한다. 지성소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하나가 되는 곳이다. 위의 것은 은혜이지만 밑의 것은 진리라는 것이다.

요한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성막, 성전에 대한 그림을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하나가 되신 분이다. 신약성경은 마태복음부터 시작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진리(the truth)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진실(in truth)이라는 말은 자주 등장하지만, 진리라는 말은 없다. 진리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예수님은 지성소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은혜를 얻기 전에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빌라도가『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예수님은『내가 진리를 전하는데, 너희가 받지 아니하는도다』라고 요한복음에서 말한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를 믿는 유대인에게『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은혜를 얻기 전에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데는 조건이 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만 한다. 그래서 참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게 은혜다. 누가복음까지는 제자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길이라는 말은 회개를 뜻한다. 예수님이『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했다. 예수님은『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이다. 길이 바로 회개를 나타낸다. 누가복음에는『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 날에 들어가기를 힘써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말했다.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들은 다 믿는 자들이다. 문을 발견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예수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만 구원받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진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요한복음 1장 11-12절에서『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된다』고 했다. 영접하는 자가 바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다.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 거듭난 자를 말한다. 거듭난 자가 진리의 길을 따르게 된다. 요한복음은 거듭난 자, 진리에 이르는 자를 말하고 있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오는 길은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좁은 길이다. 그 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런데 광야를 나온지 사흘 후에, 길이 협착하다고 하나님께 원망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야는 회개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는 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결과다. 원망하는 자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갈 수 없게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는 자는 오직 회개하는 자 뿐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민수기까지는 수많은 지명, 도시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길을 나타낸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길을 자세하게 써 놓았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를 의미한다. 회개하는 자가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요한복음1장은 회개한 자, 거듭난 자에 대해서 써 놓았다. 2장은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것과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역사를 나타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기적의 모습은 다 거듭남을 표현한다.

3장에서는『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회개로 은혜를 받은 자들이 거듭나서 진리에 있는 것이다. 진리에 있을 때 생명을 얻게 된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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