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라하마느곳


사무엘상 23장 26-29절『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후부터 사울왕이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악신이 사울왕을 번뇌케했다. 사울왕은 다윗이 마흔이라는 광야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많은 군인과 함께 죽이려 포위했다. 다윗은『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상황이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상황이다. 주님은 우리 힘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주신다. 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이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가가 밝혀지게 된다. 절망이 오면 누가 주인인가가 나타나게 된다. 다윗은 광야에서 광야로 도망다니다가 포위당했다. 그런데 갑자기 블레셋이 쳐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을 치는 것을 포기하고 블레셋과 싸우러 갔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날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셀라가 바위라는 뜻이고, 하마느곳은 분리라는 뜻이다. 절망과 다윗이 분리된다는 뜻이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 우리의 구원이 있다.『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그동안은 광야에 있었지만 엔게디 요새에 있게 된다. 예수와 함께 죽고자 하는 자는 주님이 새 삶을 주신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자 하는 자다. 다윗은『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향한 당신의 심판은 공의로우십니다』라고 말했다. 다윗이 완전히 자신을 포기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 사는 일이다. 회개는 중간이 없다. 참 회개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 날 엔게디 요새가 보이는 것이다.

사무엘상 24장 1절에서는『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라고 말했다. 성경 23장 29절에서는『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사울왕의 부하는 엔게디 광야라고 말하고, 성경은 엔게디 요새라고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남들이 보기에 광야처럼 보이지만, 예수와 함께 죽는 자는 요새로 보이는 것이다. 눈이 바뀌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절대 이 선을 통과할 수 없다. 지금까지 다윗은 도망다니면서도 포위당해왔다.

사무엘상 23장이 지나면서 영적인 판도가 바뀌게 된다. 24장 4절에서『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사울왕이 다윗을 쫒다가 동굴 안에사울왕이 들어와서 잠이 든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의 육신의 기도는 살기 위해서『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이 상황을 해결해 주세요』라는 환경을 바꾸어 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회개한 사람들의 영적 기도는『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지만 이제 죽으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오직 주님의 뜻만 기다리는 것이다. 이게 그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주시는 주님의 은혜다. 이 때가 회개가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내 생명은 주의 손에 달려 있구나』라고 깨닫는다.『셀라하마느곳』분리하는 바위, 다윗은 여기서 죽을 줄 알았는데, 절망과 분리되는 것이다. 이후 사울왕은 잠을 잔다. 이제는 옷자락을 베지만, 사무엘상 26장에 가면 사울왕의 칼과 물병을 뺏는다. 더 깊히 잠든 것이다. 다윗이『살려주세요 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더라면, 더 절망적인 상황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이제 죽었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곳이『셀라하마느곳』이 된다. 회개하는 자는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 사울왕과 그 부하들이 다 사라지는 모습을 다윗은 바라본다.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셀라하마느곳』이 되기를 바라본다면 죽은 자같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살아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거듭나는 믿음은 주님 앞에 우리가 죽어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못박혀야만 한다. 우리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 6절에서 처럼『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이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철저히 자기가 주인이면서『예수믿고 구원받는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믿음을 주신다. 이 믿음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이다.

다윗이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을 베거나, 칼을 가져갔다. 그런행위는 다윗이 주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복종이 주께 온전케 되었을 때, 사울왕을 벌하려고 예비하신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육신적인 것은 이런 일을 할 수 없게된다. 육신적인 것은 항상 살 길을 찾게된다. 내가 보기에 구원인 것을 달라고 간구한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달라고 기도한다. 영적인 것은 육신이 절대 알 수 없는,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살게된다.『셀라하마느곳』에서 완전히 살게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절망 속에서 살게하신다. 내가 도망가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게하시는 것이다.

육신은 사사로운 지혜를 사용한다. 육신은 주님의 뜻에 나의 지혜를 섞는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방해하는 자가 된다. 내 육신에서 나오는 말, 생각, 계획들이 다 주님의 뜻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전적타락을 깨닫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된다.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자구나』를 고백하는 것이다.『나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죽어야 할 자구나』를 깨달아야만 한다.『나 라는 존재는 결국 내 뜻대로 하고 마는 그런 존재구나, 나는 옛사람이구나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마땅한 자구나』를 알아야만 한다. 이런 회개도 없이 그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다 용서받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죄짓고 또 죄를 고백하고 또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옛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박히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다. 예수도 사랑하고, 세상도 좋게 느껴지고, 영적 간음하고 있는 자들은 구원에서 멀어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셀라하마느곳』이 거듭나는 곳이고, 야곱이 천사와 만난 얍복강이다. 여기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런『셀라하마느곳』의 상황을 주지 않는다. 상황으로 인해서 절망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내 상태를 바라보며 내 상태의 절망을 깨달아야만『셀라하마느곳』이 된다. 내 뜻대로 하는 것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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