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로마서 4장 23-25절『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에 죽은 것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새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것이 이루어질 줄을 믿었던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보통믿음이 아닌 것이다.
복음서에서 혈루증 환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손만 대도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이런 믿음은 내가 낳기로 열망하는 믿음과 다른 것이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분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 순간은 예수가 인간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예수님 안에는 없으며, 오직 인간 안에 있다. 우리가 죄를 자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은혜다.
주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를 얻도록 하고,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고 명령했다. 호세아에게 고통을 주셨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그 나라에 대해서 주님은 고통의 심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울왕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내가 사울왕을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사울왕의 범죄 때문에 아파했던 것이 아니라 사울왕이 세우신 다음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밤새도록 통곡했던 것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실지를 깨닫는 것이 은혜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경험을 통하여 판단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정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회개는 우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여기실지를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사울왕은 사무엘에게『내가 범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울왕은 가롯유다처럼 자기의 죄를 아파했다. 다윗은 다르다. 자기의 죄 때문에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아픔이었다.
나단이 다윗에게『부자에게 살찐 짐승이 많은데, 가난한 과부의 한마리 밖에 없는 짐승을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자말자 다윗은 분노했다.『그 자는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때 나단이『당신이 바로 빼앗은 그 자라』고 말하자, 다윗은 자기의 죄를 넘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은 것이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게 해 주셨다.
그런데 사울왕에게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픔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 죄에 대한 자기 통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가 아닌 것이다. 회개는 주님께 주님의 아픔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다. 잘못에 대한 죄의 고백 정도가 아니라, 우리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없는 것, 철저하게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서『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쏟아 부으셨구나』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것이 은혜다.
계시하여 주실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믿어지고, 주님이 예수를 살리신 것처럼 죄로 죽은 우리를 예수와 함께 죽게 하시고, 장사지낸바 되게 하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죽게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 『아브라함아 내년에 약속한 자녀를 주리라』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마엘 때문이다.
이 이스마엘이 율법을 따라 육신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 삶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열심을 내는 삶이라면 율법아래 있는 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게 사도바울이 고백했던『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것이다. 율법에 매여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요셉이 팔려갔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을 형제들에게 말했더니, 형제들이 그를 미워했다. 요셉에게는 자기 때문에 죽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증오를 당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주님의 계시로 보이는 것이다. 보디발 아내의 음란과 거짓 증언 때문에 감옥에 가게된다. 요셉이 형들의 죄 때문에 감옥에 가건,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해서 우리 스스로 마음의 감옥에 갇히건,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에는 하나의 흠도 없다고 생각했던 청년 사울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다. 사울도 구약성경에서 계시한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자다.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요셉에게는 그것이 감옥이었고, 요셉은 감옥에서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요셉은『감옥에서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구나』를 깨닫게된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는『내가 어떠한 죄임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어떠한 죽음을 죽으셨는지』를 계시하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의 범죄함으로 인해서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누구나 다 아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죽음의 계시를 깨닫는 자에게, 그것이 나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주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게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가 된다. 우리가 지식으로 받아드리고 상상하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계시를 깨달아야만 한다.『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자구나』를 깨달아야만 한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죽음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계시를 아무에게나 나타내 주시지 않는다.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얻는 자만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신다. 요셉은 자기가 생각해 볼 때 아무 죄도 없는 것이다. 자기 꿈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형들이 미워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남들의 죄로 인해서 인생이 갇혀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편 강도는 남을 괴롭히고 죽인 자였다. 남에 의해 묶여 살건, 남을 괴롭혀 살아왔건, 사울처럼 스스로 율법에 하나의 흠도 없다고 믿고 살아왔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다. 인간의 어떻게 함으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절망가운데,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자가 회개하는 자가 된다.
내가 죽을 자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가운데, 간절히 주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긍휼을 바라는 자가 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개는 죄 지은 것을 고백하고, 주님의 피를 통해서 용서받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회개며,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이 바로 값없는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