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아말렉을 미워하셨는가


사무엘상 15장 2-3절『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스라엘에 최초로 왕이 세워졌다. 하나님이 첫번째 왕인 사울왕에게 사무엘을 통하여 명령하셨다.『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내가 기억한다 애굽으로부터 나올 때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해서 몇백년이 지나갔다. 출애굽해서 사사시대가 지나갔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억이 없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심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인데, 아말렉이 쳐들어 온 것이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친 것은 아말렉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미워하셨다.

그래서 사울왕에게 명령하신 것이다.『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멸하라』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이 왜 아말렉에게만 이렇게 하셨는가? 사울왕은 아멜렉왕 아각과 살찐 짐승들을 남겨두었는데, 15장 11절에서 하나님이『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거의 모든 전쟁은 짐승들과 노획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아말렉의 짐승들을 다 죽이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아각왕을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 사무엘이 직접 죽여버렸다. 선지자 사무엘이 15장 33절에서『아각을 찍어 쪼개 죽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왜 미워하셨는가?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다니면서도 전쟁을 했다. 다윗을 추종하는 온 식구들이 아말렉에게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아말렉은 메시야를 탄생시키는 족보에 이름이 있는 다윗 가족과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납치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상은 다윗이 아말렉을 죽이는 것으로 끝마친다. 그리고 사무엘하가 시작하는데, 한 아말렉 청년이 다윗에게 뛰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소식은 사울왕이 죽었다는 것이다. 다윗이『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아말렉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 청년을 데리고 와서 그 아말렉 청년을 죽이라고 명했다. 다윗도 하나님과 같이 아말렉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사울왕은 아각왕을 죽이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사울왕이 죽은 소식을 전한 것이 아말렉 청년이었다. 이 이야기는 에스더서까지 이어진다. 에스더 시대는 페르시야 시대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을뻔 한 일이 있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 죽이도록 한 법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성경에서 하만은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은 영적인 전쟁으로 대표된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전체를 죽이려고 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말렉의 전체를 싫어하셨다. 성경에『젖먹이 어린아이까지 죽이고 짐승들까지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아말렉은 에서의 첩에서 나온 손자였다. 처음 출애굽기 17장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여호수아였다. 그리고 전쟁을 했다. 여호수아와 아말렉의 전쟁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지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칼에 달려있지 않고, 모세의 기도하는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호수아와 아말렉과의 전쟁은 로마서 8장 5-6절에서『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와 같은 말씀이다. 구약의 아말렉은 신약의 육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육신은 우리의 신앙이 지치고 약할 때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메마를 때 육신은 그때를 노린다. 구약에서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약할 때 등장하는 것을 본다. 다윗도 사울왕으로 부터 도망을 다니는데,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블레셋의 아기스라는 왕에게 투항을 하게된다. 그런데 가족들과 동료들을 시빌락에 남겨두었다.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때에 쳐들어와서 다윗의 모든 동료와 가족들을 납치해 간 족속이 아말렉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을 때에  쳐들어왔다.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에서 어려움에 쳐해있었던 상황에서 아말렉 사람 하만에 의해서 전멸당할 위기에 쳐해졌는데, 모르드개라는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의 조카 에스더에게 백성들을 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한다. 육신을 따르면 반드시 멸망한다.『육신을 따르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다.『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때는 출애굽도 아니고,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도 아니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광야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그곳에 구름기둥과 불기등이 역사하셨다. 아침마다 맛나를 먹게 하셨다. 1년이 지난 다음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다. 출애굽 당시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장자의 죽음으로부터 피하게 해주셨던 경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유월절을 지키게 한 후에 백성들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백성들이 먼저 정탐꾼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열정탐꾼들이 돌아온 후에 하는 말이『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그곳에 아낙자손이 산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강하고 담대하라』고 말했다. 열정탐꾼은 육을 따르는 자이고, 여호수아는 영을 따르는 자였다. 성령의 생각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은 나와 상황 밖에 없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없다.『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성경에서 구원은 애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구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있는가이다. 빌립보서도『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바울은『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함은 내가 복음을 전한 다음에 내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서에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한다.『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능력과 큰 확신으로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바울은 교회마다 다르게 말했다. 그 이유는 교회마다 영적인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도 마지막 장에서『할례나 무할례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거듭난 자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갈라디아 교회는 대부분 교인들이 거듭나지 않았다.『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강하게 말한다.

육체가 로마서에서는 육신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사울왕처럼 육신을 따라 산다면 아직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울왕의 아말렉왕을 죽이지 못한 것이 육신을 따라 사는 표본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말렉의 청년을 이스라엘 청년으로 하여금 죽이게 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생각은 아말렉과 같은 존재다. 가차없이 죽여야만 한다. 육신의 생각은 갓난아이 같은 측은한 생각조차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육신을 따르면 사울왕처럼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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