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19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했는데, 복음에는『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죄인이 주님을 만나면 죽은 자처럼 된다. 율법 판을 받으러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도, 성막을 지을 때도 그렇다. 죄인은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의 앞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하는데, 만날 수 없다. 그래서 회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들을 하는데, 죄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자기를 신뢰하고 예수도 믿는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리고『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고 전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기적을 일으키고 귀신을 쫒아내므로,『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회개하여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한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복음서에서 소개하는 믿음이 이런 것들이다. 베드로도 바다 위를 걷고, 온갖 기적을 경험했던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다.
믿음은 어제의 믿음과 오늘의 믿음이 서로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과거에는 주님을 바라보고 감동을 받았을지라도, 오늘 작은 문제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한다면 예수를 세번 부인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있는가? 믿음은 죽을 때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믿음은 주님이 주인이 될 때 현재 진행형이 될 수 있다. 주님만을 바라볼 때 진행형이 될 수 있다. 주님으로 인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개선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주인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믿음은 문제해결 받는 믿음에서 변화받는 믿음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회개해서 의인으로 된 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죄인은 자기를 믿지, 예수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 믿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을 해도, 하나님은 열매로 판단하지 인간들의 말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매는 회개의 열매다. 열매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다. 열매는 씨앗이 자라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열매가 된다. 복음을 전하면 칭찬이 아니라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 생명이 살아날 수 있으므로, 핍박을 받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자녀가 태어나면 해산의 수고가 사라지는 것처럼 괜찮은 것이다.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는 일이기 때문에 기쁨이 된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음으로 인해서 더 기뻐한다는 말이 있다.
회개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에 기쁨을 찾는다. 예배 때는『은혜받았다』고 말을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육신을 위해 살아가고 육신적 기쁨을 찾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착각일지도 모른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회개는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누가 주인인가? 나인가 아니면 예수님이신가?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유대사회를 장악했다. 중세 때나 오늘을 사는 현대나 교회는 많아지지만, 회개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병 고침받고, 성령 체험하는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회개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만 구원받는다.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회개하지 않는 믿음은 주님을 따라올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에서는 두가지의 기독교가 존재한다. 로이드 존스가 전하는 것과 빌리 그래함이 전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사랑 만을 전하는 기독교와 의와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가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풍랑이 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를 따를 수는 있어도, 십자가에서 못박히는 죽음 앞에선 예수를 따르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장 37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했는데, 누가복음에는 설명이 있다. 22장 32절에서『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지금은 따를 수 없지만 돌이킨 후에는 따를 수 있다는 말씀이다.『돌이킨다는 것』은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킨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바다 위에 서 있었던 예수를 따를 수 있었지만, 십자가의 죽음 앞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돌이킨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를 말해준다.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를 따를 수는 있어도, 무능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를 따르는 믿음이 없었던 베드로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교회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언젠가 베드로와 같이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이게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사람들은『매일 회개하면서 살고있다』고 주장할지라도 십자가의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회개한 적도 없는 말로만 회개한 것에 불과하다. 회개는 자기부인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기부인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이란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자기를 부인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이유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하나님을 대적한 악(탐욕의 우상)이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삶은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섞은 자의 모습이다. 이게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악한 천사의 모습이고, 에덴동산에서 옛뱀에 속은 하와의 모습이다. 악함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회개는 매일 짓는 죄를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죄를 짓게 하는 악을 발견하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만 하나님이 사해주신다. 그래야 거듭나는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33-34절에서『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앞의 요한복음 13장 37절의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우리가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적을 체험하고, 죽기를 각오한다고 결심해도 내 속에 있는 악이 죽기 전에는 십자가에 선 예수를 다 버린다는 것이다. 악은 예수와 함께 못박혀야만 한다. 말로만 못박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사는 행위로 증명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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