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익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립보서 3장 7-9절『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주님을 순종하는 자는 바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쟁 중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반드시 이기게 됨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상황에 놓여있던지, 하나님 말씀앞에서 육신의 평강과 습관, 판단대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뿐이다. 세상에서도 그런데, 교회 안에서 기복주의의 신앙에 물들어 있다면 그것은 거짓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구원은 만들어지고, 변화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회개하는 자들은 그 속에서 주님이 계시되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심에 팔려가서 상상할 수 없는 인생을 살게된다. 다른 나라에 끌려가서 종살이하고, 심지어 감옥으로 들어가서 거의 희망이 없는 인생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순종하므로 주님이 함께 하셨다. 욥처럼 자식이 죽고 재물이 다 없어지고, 몸은 병들어 고통당하고, 아내는 신앙을 비웃고, 친구들도 그의 신앙을 비판하는 상황에 놓였지만 욥은 주님 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의 그리스도가 계시된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의 동일한 고백이 된다.

빌립보서 3장 4-5절에서『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의 이력서는 화려했다. 이스라엘에서 성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몰랐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오늘날도 교회적으로 성경 지식이 많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은 믿음으로 열심 낼 때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가 될 수 있다. 그게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바울은『내가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라고 말했다. 회개하는 자는 죄사함을 구하고, 자기 구원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구원하시는 것을 찾는 것이다. 내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풍랑이 칠 때 나에게 잠자는 주님을 깨우는 것이다. 간절히 주님 만을 부르짖는 것이다. 바울은 과거에 알았던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그때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가 되는 것이다. 한글성경은『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있지만
영어성경(kjv)은『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믿음은 예수를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들어가서 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믿음』이다. 이것이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것이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율법을 의지해서 자기가 쌓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가 있다면 세상에 대해, 담대해 질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서『나는 죄인입니다. 내 죄를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내 죄의 대가를 다 치러셨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의인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머리 속에서의 논리일 뿐일 수 있다. 남에게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삶에 생명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머리 속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은『내가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성경이 생명이 되지 않으면, 성경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지식으로 전달할 뿐이다.

믿음은 단순히『내가 믿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와야만 생명이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은 거듭난 자에게 주시는 생명이다. 거듭나는 것은『내가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는』삶에 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욥처럼 죄가 생각나게 된다. 욥은 스스로 온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여려움이 옴으로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의를 쌓은 것이다. 남들이 인정할만한 믿음을 가진 자였지만, 어려움 속에 자기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욥이 말한 것처럼『그가 우리를 단련하신 이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주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세우신다. 거기서 문제 해결 만을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회개해야만 하는지를 깨닫고, 주님과 연합되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주님은『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다 구하라』고 하셨다.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거듭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기도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한 기도일 뿐이다. 우리 자신을 열매로 깨달아야만 한다. 그 열매는 생명의 열매인가다. 생명이 없는 열매는 가짜라고 할 수 있다. 존 번연이 말한 주님의 길은 쉽지 않다. 좁은 길이며, 협착하여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싫어한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복잡해! 예수믿으면 구원받는 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생명은 이 세상, 육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아니라 거듭나는 생명이 되어야만 한다.

거듭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얻었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누림이 있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이론상의 믿음인가 생명의 믿음인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론상의 믿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예수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하심을 믿지만 이론상으로 믿는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못박히는 자만 생명이 들어오는 것이다. 못박히는 자는『내가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가 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상 죽은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에게 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빌립보서 3장 7-9절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얻지 않는 것은 다 이론상으로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어야만 한다. 예수와 함께 옛사람(내 속에 있는 악)이 죽어서 내가 새사람으로 부활 생명 안에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이다. 빌립보서의 말씀이 로마서 4장의 말씀과 다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됨이 없이, 예수의 죽으신 피만 적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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