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이 세상의 것


마태복음 6장 24절『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이 누가복음 16장 13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재물은 마몬(아람어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동시에 적용됨)이다. 즉 돈의 신이다. 돈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돈에 대한 자세다. 회개는 죄악에 대한 자세의 문제다. 사울왕과 다윗은 죄악에 대한 자세가 달랐다. 다윗의 죄악에 대한 자세(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셨다. 인간의 회개의 시작은 재물에 대한 자세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회개를 말할 때 네가지 밭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재물에 대한 말씀이다. 재물이 부족할 때는 육신이 힘들지만, 재물이 넘치면 혼이 힘들게 된다. 이 둘다 하나님 말씀을 막는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9-20절에서『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재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두라고 말씀하신다. 로마서에서 주님은 재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로마서에는『하나님이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였거늘 하물며 이 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지 않겠느냐』이게 회개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계시다. 회개하지 않으면 율법 가운데 막혀있기 때문에 주님이 달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생활이 부담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십일조, 교회봉사, 시간을 달라고 하시는 것을 생각한다. 회개는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회개할 때 그 주인이 어떤 분인지 알게된다. 회개하면 주님은 왕이 되시고 아버지가 된다.

마태복음 6장 21-23절에서『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눈은 영의 상태를 드러낸다. 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준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권력과 부와 명예와 지혜까지 주셨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가지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그의 눈은 어두워져 버렸다.
성경에는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이 기근 동안에 너를 먹여 살리는 자가 사르밧 땅에 있다』고 말했다.

『사르밧』이란 의미는 용광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자기도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과부는 스스로 먹을 것도 없는데, 하나님은 그 과부를 엘리야를 먹여 살릴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엘리야가 과부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과부가『이게 마지막 떡』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떡이 살리는 시작이 된다. 열왕기상 17장 8-16절에서『과부의 밀가루통과 기름병에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왕기상 17장 17-24절의 아들을 살리는 이적을 통해서 그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게 된다. 마태복음에는『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고, 잘못하면『눈이 어두워진다』고 말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는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16장 14절에서『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라고 말했다.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은혜를 받을 수도 있지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 17장 24-27절의 말씀에 성전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다. 아들이 자기 몫의 재물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재물을 주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는 내용이다. 아버지보다 재물이 더 좋은 것이다. 재물을 다 받아서 타국 땅에서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재물을 탕진했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관점은 아들이 얼마나 재물을 탕진했는가에 있지 않고 아들이 죽은 것 같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에 있었다. 하나님은 이같이 재물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하는데, 큰 아들이 돌아와서 보고 분노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자도 이 같은 상황에서 분노할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는『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포도원주인이 품꾼과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계약을 하고, 제 삼시, 육시, 구시에, 십일시에 나가서 품꾼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거의 일이 끝날 시간인 십일시에 들어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들어온 자가 주인을 원망했다. 하나님의 재정에 대한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적인 노력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약속의 말씀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 인간은 자기의 관점에서 모든것을 바라본다. 20장 14-15절에서『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의 헬라어 원문에는『너는 내가 선하므로 너의 눈이 악하냐』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법이 선하고, 인간의 판단은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악하다는 것이다. 재물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어떠한가에 달려있다.

먼저 들어온 품꾼은 포도원주인을 원망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 들어난 것에 불과하다. 오직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약속은 명령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는 명령이다. 재물을 사랑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말씀했다. 요한1서 2장 15-16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재물을 미워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은 사치스럽게 사는 자를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일을 셈하라』는 말은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뜻이다. 이 청지기는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주인에게 빚진 것을 탕감하도록 계약서 장부를 다시 쓰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집 주인이 옳지 못한 청지기가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 종은 주인의 재정에 대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 주인의 마음은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었다. 중요한 것은 빚을 줄일 수 있게 만드는데 있다. 비록 불의한 종이었지만 빚을 줄이는데, 주인의 마음에 합하여 지는 것이다. 빚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저버린 모든 인간들 속에 있는 악을 말한다. 그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빚이 없어지는
것처럼 악도 없어져야만 한다. 악이 없어지는 것은 악이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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