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장 5-6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은 예배가운데 온전한 자였고, 주님이 칭찬했다. 그러나 욥기의 말씀을 읽다보면 주님이 욥을 책망하는 것을 본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의 예배를 칭찬하실 수 있지만 책망할 수도 있다. 그 사이에는 연단이 있었다. 욥은 한 날에 자식이 다 죽고, 도적이 들어서 재물도 다 날라갔다. 욥의 부인은 욥의 신앙을 비웃는다. 위로하러 온 그의 친구들도 욥의 신앙을 비판했다. 욥에게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것이 없었다. 욥의 친구들의 비판을 듣는 동안에 그의 몸이 잠도 못잘 만큼 병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 속에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됨을 본다.
오늘날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다윗은 도망다니면서『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시편 22편에서는『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한다. 이것이 체험적 혼의 기도라는 것이다. 우리도 삶에서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 그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혼이 불안해 할 때도 주님은 항상 그 곳에 있으신다. 주를 믿는 영적 믿음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신다.
요셉이 은20냥에 팔린 인생도 의미있는 고난이 되었다. 가롯유다가 은 삼십냥을 받고 예수를 팔아버렸다. 오늘날 우리도 고난이 있다면 의미있는 고난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고난이 의미있다면, 우리는 무엇에 감사해야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연단과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값진 보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주를 신뢰하므로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어려움 속에서 그의 신앙을 비판했다. 욥의 예배는 칭찬받았지만, 욥의 친구들로부터 신앙이 책망받는 것이다. 자식이 다 죽고 재물도 없어졌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하나님은 42장 10절에서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도의 우선순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선순위는 다르다는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나의 혼이 기뻐하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기뻐하는 것에 기도하는 것이다. 혼은 육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영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쁜 것이다. 그래서 혼의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영의 마음으로 돌이켜야만 한다. 돌이키는 것은 혼의 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영의 마음이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가 된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은 욥에게 비판하는 친구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비판하는 친구들을 통해서 욥을 드러나게 만드시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고 그래서 좋은 친구가 다가와서 위로할 때, 그 속에서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막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싫어할 말들을 쏟아내는 친구들을 통해서 회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욥은 사람들이 보기에 온전한 자였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책망받을 자였다. 그래서 그를 만들기 위해 욥이 용납할 수 없는 친구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주님이 시편에서 다윗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다윗의 숨은 허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겉의 허물을 나타내는 사울왕을 붙여주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겉의 허물을 볼 때, 그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을 드러나게 하신다.
주님은 욥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허물을 신앙을 비웃는 아내를 통하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비판하는 친구들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한 욥을 비판한 친구들을 회개하도록 기도하게 하신다.
사울왕이 죽었을 때, 다윗은 도망다니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사울왕에 대한 기도가 허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 하나님에 대한 자세는『여호와 하나님이여, 당신의 원수가 나의 원수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사울왕이 괴롭히니까, 시편에서『나의 원수가 당신의 원수입니다』라고 기도했다. 슬픈 기준이 자기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시편의 기도를 통해서 사울의 허물 때문에 다윗의 감추어진 허물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회개하는 것이다. 다윗이 회개하면서 깨닫는 것은『사울왕이 나를 회개하게 하는데 쓰임 받았구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이 죽었을 때 울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다.
욥은 친구들과의 토론, 다툼 속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다윗이 시편 초기에는 원수로 보일만큼 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다윗이 회개할 때 주님은 사울왕을 거두어 가 버렸다. 다윗이 통곡했다.『주님 나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내가 온전했더라면 사울왕이 저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통곡하는 것이다. 우리도 상대방의 허물을 보는 순간, 나의 허물에 대해서 혼적인 나도 죽어야만 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상대방의 허물에 대해서『너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너의 혼도 죽어야만 되는 것이야』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으로 주님 만을 예배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너의 혼이 죽어야 할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욥이 자기에게 비판하고 마음의 상처를 준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갑절의 복을 주신 것처럼, 욥을 책망할 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욥은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갑절의 복을 더 하셨다. 오늘날 교회에서 영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얼마나 있는가?『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지니라』라고 성경은 말한다.『신령은 영으로, 진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어』라는 말씀이다. 영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다 혼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예배는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옛사람이 죽은 자들이다.『옛사람이 죽는다』는 표현은 자신의 혼적인 것을 하나님 말씀 앞에서 부인하는 자가 된다는 말씀이다. 혼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영의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과 일치시킨다.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생각은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 생각을 솟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혼인가 영인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혼의 생각들로 가득차게 된다. 혼의 생각은 다른 사람도 혼적인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판할 때, 자신의 혼적인 모습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여 영의 마음으로 돌이켜야만 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판할 때, 『자기를 돌이켜보는 자』와『자기를 항변하기 위해 비판한 자와 다투는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욥기가 말해주는 것은『다른 사람의 비판을 겸허이 받아드려서, 자신이 영의 마음에서 벗어난 상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게 거듭난 자의 믿음의 자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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