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믿음
갈라디아서 3장 23절『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많은 사람들은 안 믿다가 믿기로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게 면죄부와 같은 거짓이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기준은 하나님에게 있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을 해석해 주고, 죄수가 총리가 되는 요셉의 역사가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요셉은 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다. 종살이 하므로 매인바 된 것이다. 그는 누명을 쓰고 보디발의 감옥에 묶여서 갇혀있었다. 거기에서 믿음이 계시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궁중의 죄수를 가두는 보디발 집에 있는 감옥이었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믿는다고 생각하므로, 율법으로부터 빠져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현재의 우리보다 하나님께 예배도 더 잘 드리고, 하루에 몇번씩 기도도 하고, 성경 지식도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다. 영적 소경들이었다. 성경을 알고 있는 자들이 기록된 대로 태어나시고 삶을 산 예수를 죽인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가 계시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가 계시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만 한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보며, 죽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야만 한다.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영적 소경인 바리새인과 같이 된다. 율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 나올 수 있다. 아버지 집에서 사랑받던 요셉은 감옥에서 완전히 죽은 자 같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새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어떠한 상황에 있던 예수와 함께 죽는다면, 부활의 능력으로 주님이 즉시 율법 아래서 풀어주실 것이다. 이 상황이 요셉이 죄수가 갑자기 총리가 되는 그런 느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화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는『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다. 3장 6-7절에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그 믿음이다. 그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 믿음인가? 아니면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리라고 하는 부활의 믿음인가?『예수를 믿는다』는 말은『예수가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를 고백하고, 그 사실을 믿으면 구원받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래서『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 되어야 한다.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가?
미국의 niv성경은『so that what was promised, being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ose who believe.』 영국의 kjv 성경은『that the promise by faith of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em that believe.』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는『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아 내가 너의 씨에게 약속한다』고 되어있다. 신약의 이 약속이 구약의 그 약속이다. 3장 14-15절에서는『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는 그 약속을 구약에서 씨에게 했다는 것이다. 구약을 읽을 때 아브라함과 그의 씨라고 하면, 그 씨를 이삭으로 생각하고 읽는다. 그 때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는다. 그런데 그 씨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말해주고 있다.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은 아브라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이 생긴 것처럼, 불가능한 방법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인간 예수가 부활생명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것을 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자녀를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는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은 다 이스마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이스마엘로 인해서 그가 태어났을 때는 기뻐했지만, 그 이후에는 그로 인해서 연단의 연속이 되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동한다면 처음에는 그 방법으로 기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단의 시작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중간에 개입하셔서 말씀해 주신다.『내가 주리라』라는 것을 받을 때, 그것이 선물이 된다. 이 정도가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믿으면 구원받는 그런 믿음은 자신이 어떤 사실을 믿는 그런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가운데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면,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 된다.
회개는 우리의 내면 속에 역사하게 된다. 회개는 우리의 내면의 속성을 부인하는데서 출발해야만 한다. 아무리 환경이 개선되고 노력해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는 일 뿐이다. 이게 복음서의 구원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사람들이『내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들면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 성경을 읽어도 좋아하는 부분을 읽고 감격해 하지만,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통과하는 것이다. 이스마엘에 불과한 자기 방식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얻는 그 씨의 약속이 이삭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계시된 것 처럼,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계시되어야만 한다. 그 그리스도는 기적을 나타내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도 믿음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은 거듭남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속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이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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