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으로 말미암아(2)
로마서 3장 24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속량이라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가 된다. 그런데 4장 2-3절에서는『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장 24절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볼 때, 아브람의 이름은 99세까지였다. 100세가 되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이다. 즉 할례로 인하여 새사람이 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75세에『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99세까지는 아브람이었다.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옛사람의 옷을 벗고, 새사람의 옷을 입었을 때를 말한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옷을 바꿔 입었을 때다.
75세에서 99세까지의 아브람은 롯과 결별하면서 롯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다. 그리고 전쟁을 이기며, 멜기세덱을 만나는 영적체험도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 사이로 불이 지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런 경험과 체험을 했지만 99세가 되었을 때『내년에 약속의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것이 제거되는 것이다. 바울은 육신적인 것을 옛사람이라 표현했다.
4장 19-22절에서는『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이 믿음은『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그 믿음이다. 죄인에게 하나님의 의가 먼저 나타나신다. 그래서 죄인이 의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로마서 3장 25-26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장 24절에서 속량된 자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속량된 자에게는 값없이,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이 죽음의 값을 지불하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누가복음 4장 5-7절에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빌라도 앞에서『내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사탄에게 일정기간 임대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은 모두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다. 관리권이 사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사탄으로부터 사는 것이다. 그 사는 값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사탄의 권리가 종료되는 시점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된다. 그때 사탄은 무저갱에 갇힐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이다. 사탄의 자녀로부터 사서 자기의 자녀로 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이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사탄의 종인 죄인의 손에 팔려서 사탄의 종에 의해 죽게 하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하여 새사람의 옷을 입은 자도 이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 아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직 회개하여 새사람의 옷을 입은 자만『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신약의 서신서에서는 회개하여 새옷을 입은 자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의롭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회 처음 나와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를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속량이다.
회개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약속이 있다.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였으니 죄인도 값을 지불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로 회개한 자에게는 값없이 의로움을 얻게 된다. 죄인이 회개로 지불해야만 하는 값은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한 자(새옷을 갈아입는 자) 되면 값없이 얻는 것이다. 회개는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한 자는 값없이 의를 얻는다. 그런데 오늘날 회개한 적도 없으면서 값없이 의를 얻는다는 말씀만 적용시키려고 한다. 회개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옛사람의 옷을 벗었는가?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이 예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옛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이 선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 사람들은 반대로 행하려고 한다. 먼저 믿기만 하면 칭의되고, 그 다음에 옛사람을 죽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매없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여기에 주어는 하나님이시다.『이 예수를』라고 말하는 예수는 피값으로 속량된 자를 사는『이 예수』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히브리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게 속량이다. 그래서 그 땅을 의로움 가운데 얻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화목제물은 히브리서 9장 5절에서도 있다.『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여기서『그 위에』라는 말은『언약궤 위에』라는 뜻이다. 언약궤 위에 덮개(속죄소)가 있다. 그 위에는 속죄소를 덮는 그룹(cherub:스랍)천사들이 있다. 언약궤 안에는 맛나, 싹난 아론의 지팡이와 언약의 두 돌판이 있다. 아래는 두 돌판, 위에는 속죄소와 두 그룹이 있는 것이다.
이 속죄소가 로마서 3장에서 말하는 화목제물이다. 언약궤는 방주와 같은 단어다.
지성소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 곳에는 뽑힌 제사장만 1년에 한번 대속죄일(욤키프르)에 들어갈 수 있다. 속죄소(덮개)를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화목제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모세오경에서는『이 덮개를 만지면 죽고, 열려도 죽는다』라고 했다. 덮혀있는 것이다. 언약의 두 돌판을 덮고 있는 것이다. 덮으므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덮개가 없다면, 하나님은 두 돌판에 새겨진 말씀대로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덮개로 덮어놓은 것이다. 덮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죽음으로 덮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시대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심판하시려고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주는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심판에서 덮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다. 덮개이신 그리스도가 없다면 모든 죄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방주나 지성소의 법궤는 다 같은 이치다. 덮개가 히브리서에서는 속죄소이고, 로마서에서는 화목제물이라고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머리에 쓰는 모자(키파르:R은 묵음)의 의미가 바로 그런 뜻이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방주를 만드는 자 외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속죄소에 들어가는 자는 옷을 갈아입어야만 한다. 옛사람의 옷을 벗고, 오직 새사람의 옷을 바꿔입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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