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값주고 사신 속량(2)


로마서 3장 23-24절『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속량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많은 교회의 현실은 죄사함 받는데에 몰두되어 있다. 속량이 있어야 죄사함을 받는데, 속량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죄사함만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자기가 지은 세상죄만 용서받으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가 속량된다. 그러므로 속량되지 않은 자는 회개하지 않은 자다. 회개는 지은 죄를 고백하고,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속량하시는 이유는 23절에서『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가 된다. 죄는 두 종류가 있다. 죄를 엄밀히 말하자면 죄악이라고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죄와 악이라는 것이다. 악은 하나님을 떠난 자의 모습이다. 그게 바로 옛사람이다. 그리고 죄는 세상죄를 말한다. 악은 죄를 사랑하게 만든다. 악은 죄의 뿌리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는 뿌리다. 잡초를 뽑아도 또 다시 나는 것과 같다.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계속 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속량(Redeem)하신 것이다. 교회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만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죽음으로, 그 안에 있는 자를 속량하신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내가 열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만 쌓을 뿐이다. 오직 길은『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옛사람의 옷을 벗는 길 뿐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열심을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먼저 옛사람의 옷을 벗고, 주어진 거룩을 지켜야만 한다.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의 옷을 벗고, 주어진 거룩을 지키는 것이다. 거룩은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열심을 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이 살아있다면, 깨닫고 옛사람의 옷을 벗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죽었다면 벗지 못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양심이 살아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살아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그래서 회개는 어둠 속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회개는 그 어두움 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빛이 비춰지는 것이 바로 은혜가 된다. 그 은혜에 반응하여 옛사람의 옷을 벗는 자만이 어두움으로부터 나오는 자가 된다. 옷을 벗지 않으면,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나오는 은혜를 베푸셨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한 히브리 백성과 같은 자가 된다. 열정탐꾼과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한다. 온갖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두고 다 도망가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때에 살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새벽에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곧 여명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지금은 가장 밝은 때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 16-17절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또한 이사야서42장7절에서『내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큰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안에 있는 자가 흑암에서 나오는 자가 된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양심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회개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돌아가야만 회개하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통해서 옛사람의 옷을 벗어야만 된다.

노아가 만든 방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자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런데,『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옛사람의 옷을 벗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적용된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에서, 5절의 말씀을 하신 후에 적용한 것이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물이 장사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6장 4-7절의 말씀처럼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과 요한1서 2장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고 한 말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때, 120년간 회개의 복음을 전했지만 8명 외에는 방주에 들어가는 자가 없었다.『도끼가 나무 뿌리 밑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우리라』이게 복음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죄인들이 돌이켜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룻이 죽은 남편의 땅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우리에게 죽은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마치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룻이 죽은 남편의 땅으로 돌아갔지만 남편의 땅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룻은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이다. 남편의 땅이 죽어있는 것이다. 누가 남편의 땅을 대신 사주어야만 되는 것이다. 땅을 사줄 친족(가알ga'al:속량)이 나타나야만 한다. 룻이 그 친족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아주실 것이다. 우리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죽어있는 것이다. 속량이라는 말은 레위기에도 등장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주신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고, 죄인은 죽어있는 자가 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다. 옛사람의 옷을 벗지 않은 자가 그렇다는 말씀이다.『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고, 세상에 대해서는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복음으로 말미암아『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어있고, 세상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죄인은 내가 살아있고 하나님이 없지만, 의인은 하나님만 살아있고 나는 죽어있는 자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어 있지만,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만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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