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베드로전서 1장 23-25절『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구원은 거듭남이다. 죄사함은 거듭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거듭남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장사된 바가 된 자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부활생명이 들어와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도 선물이다.『너희는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이 말씀은 오순절 때 베드로가 한 유명한 설교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세례는 노아 때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과 같이 물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 되는 것을 믿는 것이다. 2천년 전 예수의 죽음(시체)에 나의 혼이 결합되어 나의 죽음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 속량 즉 구속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죽었던 나의 영을 살리시는 것이다. 이것이 새창조이고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썩지 않을 진리를 붙잡는 것이다. 베드로는『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이사야서 40장의 말씀을 인용했던 세례요한의 말을 다시 인용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이사야서 40장 6-8절에서『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기운은 여호와의 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역사하여 영원히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가 외친 것이 바로 세례요한이 외친 것과 같다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역사하시면 이 세상의 것은 말라버린다. 세례요한이 외칠 때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살았다. 로마제국의 힘든 삶 때문에 광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세레요한이 말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핑계와 변명을 앞세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하와에게『선악과를 왜 먹었느냐』라고 물었을 때, 뱀이 주어서 먹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먹은 것을 감추고, 뱀에게 핑계를 대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너는 왜 먹었느냐』라고 물었을 때『당신이 만들어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는 것이다. 핑계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여자 때문이라는 핑계로 느껴진다. 그래서 에덴동산으로부터 쫒겨났다.
육신은 눈이 밖으로 향하고 있어서, 남의 잘못은 보지만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한다. 회개하면 내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영적인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의 능력으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게 되는 것이다. 육신의 풀은 마르고 시들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회개하여 육신의 풀이 마르고 시들때 거듭난 것을 깨닫게 된다. 육신의 풀이 불에 타 버릴 때 거듭남을 알게된다.
교회사람들은 누군가의 인도로 교회를 오게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게된다. 이는 마태복음에서 왕의 혼인잔치에 아무나 초대되어 온 자들과 같은 것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되어 혼인잔치의 주최가 왕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주최 측에서 주는 등불을 킨 것이다. 여기까지는 미련한 다섯처녀나 지혜로운 다섯처녀나 다 같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다른 것은 다른 기름을 준비했는가의 차이다. 이는 왕의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었는가 아닌가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다른 기름은 다름 아닌 자신을 태워버릴 육신의 풀이라는 것이다. 회개는 육신의 풀을 태워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의 육으로 비롯된 혼적인 것을 태워버려야만 한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 된다. 복음만이 썩지 않을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회개하는 자에게는 이 부패한 마음에 영원히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가 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썩지 아니할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그렇지 이 말씀이 나에게 거듭나게 해 주시는 것이지』가 아니라, 자기부인의 회개하는 자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밭의 비유처럼, 길가 밭, 돌짝 밭, 가시떨기 밭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마치 영원할 것처럼 기뻐한다.
전도서 1장 2절에서『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 영원한 말씀을 붙잡는다. 그래서 회개해야만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회개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회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회개의 복음은 세례요한이 전한 복음과 사도요한이 전한 복음이 다르지 않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거듭남은 내적변화를 말한다. 기적을 체험하고,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변화없으면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간증은 회개의 기회를 잡는 것에 불과하다. 회개는 예수의 죽으심(시체)과 나의 혼이 연합되는 것이다. 회개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처럼 죽은 자같이 되어 돌아가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가 적용된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 사람들도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카인과 아벨에서 카인은 성취라는 이름으로 아벨은 헛되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인처럼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한다. 솔로몬이 그러했다. 그러나 결국 아벨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교회 안에서 썩어질 말씀을 가득차있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세상의 것을 원하는 기도와 세상의 것을 찾는 기복신앙으로 차 있다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거듭나지도 않은데, 설교자가 여러분들은 다 거듭나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구원이 아닌 것이다. 그 설교를 듣고『나는 예수믿으므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가짜 복음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승리는 헛되고 헛된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썩지 않을 영원한 말씀을 얻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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