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
로마서 3장 24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4장 3절에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3장 24절과 4장 3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3장 24절을 읽지 않고 4장 23절을 읽게 되면 구원이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100세때 의로움을 얻는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75세에 부르시고 99세가 될 때까지, 의롭다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만을 의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을 통해서, 상황 속에서 문제의 해결방법을 스스로 찾으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아브람이 75세에서 99세까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그런 놀라운 기적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셨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언약은 짐승을 쪼개놓고 약속의 당사자가 서로 그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불만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반쪽 언약이라고 말한다. 완전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초대한 왕의 혼인잔치와 같은 이치다. 오늘날 누군가의 도움으로 교회에 온, 거듭나기 전의 사람들이다. 혼인잔치에 들어가려고 등을 든 미련한 다섯처녀와 같은 것이다. 신약으로 말하자면 이 믿음은 복음서의 믿음이지, 쌍방이 함께 죽는 영원한 언약이 아닌 것이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후 12년간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에 나와서 교회생활을 하지만, 세상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2년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영원한 언약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 할례는 육신을 제거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약속의 씨를 주신다는 것이다. 신약(로마서 6장 4절)에서 세례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는데도 아브람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영원한 언약은 로마서 4장 19절에서 나타난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어떻게 되어서 이런 믿음이 되었는지 중간과정의 설명은 없지만, 99세에서 100세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이 되는 믿음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왕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기름통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영원한 언약은 함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이다. 오늘날 교회안에서도 『옛사람이 예수와 합하여 장사지내는 것』을 세례라고 말한다. 쌍방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는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죄악을 없애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옛사람이라는 악을 없애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하신 언약은 쌍방이 죽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면 미련한 다섯처녀처럼, 혼인잔치 문이 닫힌 후에 들어가려고 해도 그 때는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도 어려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벗어날 수는 있지만, 변화되고 새생명을 주시는 은혜는 옛사람의 옷을 벗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옛사람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입고 있는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 나아가,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처럼 옛사람이 죽어야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베드로와 같이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목격하고, 오병이어의 경험을 해도 내적 생명의 변화가 없다면, 예수를 버리는 자가 된다. 많은 교회에서는 비록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이후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도로서 역할을 다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회개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주님 잘못했어요, 제가 그 때 도망간 것을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생각한다면 회개의 의미를 모른 것이다. 베드로의 회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성경에는 없지만『나는 죽어야 할 옛사람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옛사람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죽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설명해 주는 것이다.
히브리 백성이 출애굽해서 홍해바다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넜다. 홍해바다를 건넌 것은 영원한 언약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넌 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한다면 곤란하다. 홍해바다를 건너 광야로 나간 것이다. 광야에서 옛사람은 다 죽었다. 오직 새사람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사실이다.
홍해바다를 건너 광야에 들어간 것이 아브람의 75세에서 99세까지의 삶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브라함의 100세때 이루어진 것과 같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 자는 거듭난 자(새사람) 외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옛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예수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영원한 언약은 이삭으로 시작된다. 그 전에는 일방적인 언약이다. 영원한 언약은 쌍방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함으로서, 육신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서 약속의 씨를 얻는 쌍방적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할례는 신약에서는 세례로 설명될 수 있다.『세례는 예수와 연합하여 장사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듭나는 것과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같은 것이다. 거듭나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같은 것이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어야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옛사람이 죽지도 않았는데, 다『세례받고 거듭났다』고 말한다. 무엇이 증명해주는가? 회개의 열매가 증명해 주실 것이다. 거듭난 자의 삶은 세상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의 삶이다.
그래서 오늘날『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쉬워보이는 복음은 가짜가 될 수 있다. 회개없는 구원은 다 가짜다. 회개는 옛사람의 옷을 벗는 것이다. 죄의 고백을 회개라고 믿는다면, 반쪽만 이해했을 뿐이다. 죄의 고백과 옛사람의 죽음없이는 회개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 4장 3절에서 말하는『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라고 말하는 의는 아브라함이 100세때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난 75세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4절의 말씀을 먼저 기억해야만 한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속량이 피값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탄으로 부터 사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옛사람을 벗어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옛사람을 벗는 의식이다. 할례도 육적인 것을 제거하는 의식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죄의 값을 예수의 피로 사는 것이다. 이게 속량이다. 사는 자의 대상은 옛사람이 죽는 자만 해당된다. 쌍방적 약속이 영원한 언약이 된다. 옛사람이 죽는 자만 예수의 피값으로 사는 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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