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값주고 사신 속량
에베소서 1장 7절『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바울은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속량에 대해서 설명한다. 1장 13절에서는『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속량받은 자가 죄사함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속량받지 않으면 죄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장 11절에서는『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기업은 가나안으로 들어간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광야에서 기업을 준 적이 없다. 오직 가나안에 들어간 자에게 기업이 주어졌다. 요단강 건너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업을 얻는 것이다. 찬송가에서『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르는 장송곡 같은 내용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체험하는 그런 것이다. 이 세상을 광야 같은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반만 아는 것이다. 천국이 가나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광야와 가나안을 체험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자 말자, 할례를 행하고 아낙자손과 전쟁을 시작한다. 천국은 전쟁이 없는 곳이다. 가나안을 천국으로 비유하고 있으나, 가나안은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비유가 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기업이 된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기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3장 24절에서『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그런데 이 말씀을 읽지않고, 4장으로 건너가서 의로움에 대해서 읽으면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다. 3장에서 속량을 말하는데, 4장을 읽으면 놀라운 은혜만을 생각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속량받은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25년이라는 기간이 지나서였다.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그런 기간이 소요된 것을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어느 신도가 예수를 믿기로 하고 영접했다고 말로 선언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순종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뀌어야 되는 일이다. 속량은 나의 주인됨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환경 속에서 권력과 명예와 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믿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마음을 통해서 속량된 자인가 아닌 자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조명함으로서, 속량된 자인가를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에게는 오직 이스마엘 만이 있었지만,『자녀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게 된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늘날도 성경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방식대로 산다면, 비록 몸은 교회에 있으나, 아브라함의 99세까지의 삶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교회에 인도하는 은혜를 받았지만,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처럼, 율법 속에 갇혀 있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죄인의 모습을 하면서 스스로는 값없는 은혜로 의인이 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섞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 약속의 말씀 앞에서 포기해야만 한다.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장사되면 새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장사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속량이 이루어진다. 속량이라는 말은 값을 치루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죽은 예수와 함께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로 설명한다.
로마서 3장은 예수의 피값으로 속량하는 것을 설명하고, 4장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3장과 4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장 4장의 연결된 것을 6장 7절에서 종합적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다.『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여기서『죽은 자』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장사된 자를 말한다. 죽은 자가 바로 속량되는 것이다. 이게 세례라는 것이다.
속량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가알(ga'al)이라고 말하며,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48장이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그 때 야곱이 축복하는 기도문이다.
48장 15-16절에서『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여기에서『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라는 말이 나온다. 번역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미국niv 성경은 『the Angel who has delivered me from all harm』영국kjv성경은『The Angel which redeemed me from all evil』환난이 아니라 악으로 표현했다. 모든 악으로부터 속량하신 여호와의 사자라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자를『자기를 모든 악으로부터 속량하신 사자』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라반 집에 있던 야곱에게 나타나셔서『너의 조상의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야곱은 밤에 야반도주하는 식으로 라반 집으로부터 도망갔다. 심지어는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혼자 남아 두려움에 떨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형 에서가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악(evil)』이라는 것이다. 이게 열정탐꾼과 같은 것이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다. 하나님은『염려하지 말라 내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했는데『나는 에서를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씨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리는 것이다. 이게 속량이다.
이 속량은 아브라함이 죽은 것 같이 된 100세때 일어난 일이다. 완전히 부서지고 죽은 자같이 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만 의지하게 된다. 야곱은 요셉이 총리가 되고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는데, 야곱 자신이 환도뼈가 부숴진 그런 경험을 하게 한 하나님의 사자에게『이 아이들도 그렇게 살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삶이 있다면 환도뼈가 부숴지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환도뼈가 부숴지고,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우리도 이름이 바뀌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6장 6절에서도 표현되었다.『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히브리 백성을 건져내셨다. 오늘날도 세상으로부터 건져내어 교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여전히 세상(애굽)에 머물고 있는 자는 교회 안에 있지만 속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애굽으로부터 나왔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자는 열정탐꾼과 같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반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게 속량된 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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