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로마서 10장 9절『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주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주인이라는 뜻과 여호와라는 뜻이다. 여기서『예수를 주로 시인하며』주는 주인이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당신은 그리스도 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Thou art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kjv) 라고 말했다. 우리 말 성경은『주는 그리스도이시요』라고 되어있지만, 번역상 우리나라 전통상 당신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당신 대신 주라는 말을 끼워 넣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도마가 예수님을 만진 후에 my Lord, my God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Lord는 거룩하신 분(여호와)라는 뜻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야만 한다. 계시는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다.『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것은 새창조가 된다. 성경에 천지창조를 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 그런데 부활은 새창조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이 새창조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새창조가 된다. 예수님이 죽을 때는 죄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부활은 하나님이 친히 홀로 그렇게 하셨다. 거듭남이 부활이다. 거듭난 자의 삶은 부활한 예수님이 주가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옛사람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물은 죽음을 나타낸다. 물은 노아의 홍수때 죽은 자임을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설명한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께 대한 자아였다. 욥은 행복과 성공, 건강을 잃어버렸다. 친구들과는 인간관계가 파괴되어 버렸다. 마지막 남은 것은 주만 바라보든지 아닌지였다.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주가 회복되었다.『전에는 귀로 듣기만 했지만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주가 계시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고 말하며,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앞절(10장 6절)에 바울이『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을 설명한다.『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가나안 땅 앞에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된다. 죽어서『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은 모세가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7-8절에서『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바울이 말하기를 믿음은 가나안 땅 앞에서 모세가 말한 그 말과 같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이 애굽을 나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과 애굽을 나온 히브리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만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홍해바다를 건넜다고 구원받은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야만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차라리 애굽이 나았도다』라고 말들을 한다. 몸은 애굽을 나왔지만 마음은 애굽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이 더 좋게 여겨지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세상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회개의 말씀이 선포된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회개는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게 만드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못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잘못한 결과만 용서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회개는 세상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죽어야만 한다. 세상을 나왔다고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은『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어린양의 피를 칠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홍해바다를 건너서 광야로 나왔지만 그것은 구원의 기회를 얻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히브리 백성들은 광야로 나오자 말자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맛나를 먹고, 구름기등과 불기둥으로 보호받았지만 하나님을 원망했다. 놀라운 경험과 체험을 해도, 자기가 주인인 삶은 세상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옛사람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구원은 죄를 짓게 만드는 옛사람이 먼저 죽어야만 한다. 이것이 죄로 부터 해방이다.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오늘날 옛사람이 죽지도 않으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옛사람의 죽음이 빠져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해방을 뜻한다. 옛사람이 죽어야만 해방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식으로 말한다. 죄사함만 받으면 구원받는 줄로 생각한다. 죄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옛사람이 처리되지 않으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옛사람의 죽음이 구원이다. 옛사람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세례의식이다. 세례받았다는 것은 옛사람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또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정말 옛사람이 죽었는가? 많은 교회 사람들은 여기에서 고민하고 있다. 세례받은 사람들도 죄를 회개해야만 하는가?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거듭난 자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거듭나서 세례받은 자는 죄의 문제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옛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죽여야만 한다. 그래서 세례받은 자는 영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거듭나기 전에는 죄의 종이므로 죄악과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거듭난 이후에는 죄를 불러일으키는 악(죄성:옛사람)과 싸워야 한다.
정체성이 중요하다. 내가 싸우려고 한다면 넘어진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승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넘어지는 경우가 있어도 십자가에서 세상죄를 다 가져가신 분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생각해야만 이기는 자의 삶을 살게된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자는 마치 거룩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구원받은 자가 아닌 것이다. 옛사람이 죽지도 않으면서,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예수의 피를 매일 매일 요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예수를 죽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날마다 자기의 옛사람을 죽이는 자가 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로마서 8장 6-7절에서『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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