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구속
에베소서 1장 7절『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그리스도 안』이라는 의미는『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삶이 된다. 이것이 회개한 자에게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가 된 자는 그의 피로 속량되어, 죄사함을 받는다. 그래서 14절에서는『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옛날 성경은 속량이라는 말 대신에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구원하여 속량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회개한 자를 피값을 지불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사함을 얻게된다. 피값의 역할은 첫째가 죄인을 사는 것이고, 그 다음에 죄를 씻는 것이다. 회개한 자가 되어야만 이런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회개라는 말을 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은『이미 회개하여 거듭난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14절의『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얻은 것이 돈을 주고 샀다는 뜻이다. 그래서 얻은 것을 속량한다는 것이다. 속량하면 그 피값으로 속량된 자가 주인을 찬송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인 룻의 남편은 가나안에서 요단강 밖인 모압 땅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방 여인인 룻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룻은 슬픔에 싸였지만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시어머니도 남편이 없고 아들도 없어진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죽은 곳에 머물지 않고, 남편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으로 향한 것이다. 시어머니는 이제 내 이름이 나오미(기쁨)이 아니라, 마라(쓴)다고 했다. 룻은 시어머니의 쓴 인생에 합류하여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먹을 것이 없어서 이삭을 주워러 밭으로 나가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룻기 2장 2절에서『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이 말은 평범한 말인 것 같지만 위임권위에 대한 말씀과 연결된다.
요나단이 전쟁에서 아버지인 사울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나갔다. 그는 전쟁에 대한 열망과 승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주님이 붙여주시면 승리한 것으로 믿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의병기를 든 소년 한 명과 전쟁에 나가는 것이다. 용맹, 헌신, 주님께 대한 신뢰가 있었지만 위임권위에 대한 순종이 없었다. 그런데 룻기는 룻을 통해서 위임권위를 따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룻이 돌아간 남편의 땅은 이미 남의 땅이 되었다. 룻기 2장 1절에서『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룻과 나오미는 룻이 나가고자 한 밭이 바로 보아스의 밭인 것을 몰랐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치 사르밧 땅 과부가 마지막 떡을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사르밧 땅으로 가서 과부에게『먹을 것을 달라』고 하라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이게 마지막 떡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기근이 끝날 때까지『너를 살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상황 속에서 나를 살피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 속에서 나를 살피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룻이 오늘 먹을 것을 위하여 밭에 이삭을 주워러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된다.
무엇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으로 이끄는 것인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렇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룻기 2장 1절에서 유력한 친족 보아스를 말하고, 2절에서 룻이 1절의 내용을 모른채 이삭을 주워러 나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3절에서『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여기서『우연히』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하면,『her chance happened that 그녀의 기회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어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믿음을 지키고 있으면, 이런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우연히』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2장 20절에서『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19절에서 룻이『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이 보아스』라고 말하자, 20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육신 때문에 오늘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지만, 하나님께서 기회의 은혜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20절 마지막 부분에서『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kjv 성경은『The man is near of kin unto us, one of our next kinsmen』 으로 번역되어 있다.『one of our next kinsmen』이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서는『속량』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기업 무를 자가 바로 속량이라』는 뜻이다.
유대백성들이 오순절마다 룻기를 읽어왔다. 이 룻기는 오순절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처럼 읽어온 것이다. 남편이 죽고 자기 아들들이 죽은 슬픔 속에서, 이 시어머니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가 바로 오순절이었다. 보아스는 룻의 인생을 회복할 자라는 것이다. 이 보아스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다.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 어떤 기회를 주실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이 어떤 어려움 속으로 들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가짜 복음과 배도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마음을 지키는 자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의 남편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세상을 쳐서 죽여버리는 것이다. 세상에 빼앗긴 약속의 땅을 되찾는 것이 속량이다. 세상에 빼앗긴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이 속량이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룻기 2장 20절의『기업 무를 자』라는 단어가 창세기 48장 16절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표현이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아버지 야곱을 만났다. 이 때 요셉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축복해 달라는 내용이 나온다.『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라고 표현한다. 사자는 메신저라는 말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함께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고 감동할 수 있으나 상황 앞에 서면 야곱과 같이 두려움에 떨게 된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 야곱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상황에 반응하면, 가나안 땅 앞에서 열정탐꾼과 같이『들어가면 죽는다』가 된다. 야곱이『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형 에서만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다. 환도뼈가 부숴지는 것이 구속이 된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길만이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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