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빌립보서 3장 7-9절『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여기에서『내게 유익하던 것』과『그리스도를 얻고』는 서로 상반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이시다. 왜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내게 유익하던 것』은 부모로 받은 육체가 좋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을 박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 갇힌 자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 4장 2-3절에서『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여기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죽은 것 같이 된 때의 믿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은『내가 믿습니다 영접합니다』 라고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부인하는 그 때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하심을 믿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 믿게 된 상태를 바탕으로 말씀하신다. 회개라는 바탕으로 말씀하신다.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신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은 자의 믿음과 자기 십자가 사이에 공극이 생기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교회 사람들이 믿는다는 말을 하지만, 그 믿음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다양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것을 믿는 것,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믿음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듣고 본 사람들이 찾아와『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이『내 말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다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누가 더 크냐』라고 다투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기복적인 모습을 본다. 행복과 안정을 빌거나, 믿음과 재물을 연관시키는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누가 크냐』라고 다투던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그런 상황에서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 믿음이 된다.
믿음은 지식으로 알아가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과 같은 상태가 되는 믿음이 되어야만 한다. 이게 실상이 된다. 이론과 지식이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믿는 것이다. 천로역정을 쓴『존 번연』은 거의 10년이상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서 고민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의 수사였다. 그는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자였다. 3년이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르친 신학자였다. 그렇지만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생명이 되지 못한 것은 실제상황과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책감으로부터 놓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죄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아야만 한다. 그래서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실제상황 속에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의로움을 받는 믿음이 된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 속에서는 원죄라는 죄성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세례다.
로마서 6장 3-4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생명이 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믿음이 되지 않으면 생명이 아닌 것이다. 로마서 4장 25절에서『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예수를 아는 지식은『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 고마워요』라고 말하면서, 눈물 흘리며, 마음으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다가올 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믿음이 된다. 이게 자신을 부인하는 실제상황과 같은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처럼 죽은 자를 하나님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다.
새생명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 속에 생명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 부터 받은 육체는 장사되고,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해 주신다. 이것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서『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말하면서 부활(거듭남)에 대해서, 15장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고 말했다. 이전 것이 장사된 실제상황이 되지 못하면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 속에 자신을 생각한다면, 다시 태어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듭난 상태가 되어야 하늘로부터 받은 믿음이 된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지식으로, 또는 마음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에 근거하므로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믿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는 곳이 십자가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가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가 신령한 몸으로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서 부활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부활하여 거듭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없이는 부활도 없고, 거듭남도 없다. 예수와 함께 장사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진 곳이다. 정오부터 칠흙같은 어두움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시다. 이게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거듭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그를 믿는 신도 사이에 큰 공극이 있을 발견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자는 2000년 전에 죽은 예수의 피로 믿는 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을 받는다. 죄를 짓게 하는 육신이 장사된 것을 믿기 때문이다. 새생명 가운데 거듭난 자는 죄를 고민하지 않고, 현실적 육체로부터 나타나는 죄성이 솟아나지 않도록 싸우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현실적 육체를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져야만 한다. 다시 육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 현실적 육체를 통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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