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장 36-38절『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를 죽인 무리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 속한 무리인가? 깊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그들이 예수를 죽인 무리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양심이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십자가와 연합됨이 없이,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양심이 살아있다면 예수를 죽인 무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깨닫는 사람들은 회개할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행함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지는 것이다. 회개와『그의 죽으심과 합하여』라는 말은 연결되어 있다. 회개한 자가 그의 죽으심과 합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십자가로 돌이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회개의 의미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그의 죽으심과 합한 사람은 알 수 있다. 그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 예수님의 보혈이 작동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의 세례받은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세례는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교회 사람들은 육체로 인하여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회개하여 예수의 보혈로 씻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회개는 죄를 고백하고 죄를 씻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죄에 대해서 죽지 않은 자가 세례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세례는 죄를 씻는 것』으로 왜곡시킨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양심이 살아있다면 자신도 예수를 죽인 자의 무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지는 것이다. 모든 교회에서 성찬식을 한다. 그래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신다. 먹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가 되는 것도 모르면서 먹으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27절에서『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바로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11장 26절에서는『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전해야만 하는 것은『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세례의 내용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그런데 오늘날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을 전하지 않고,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만 전하고 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모르거나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다. 둘 다 구렁텅이로 빠진다. 그런 마음이 없는 자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 줄로 생각한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사도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지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 만이 구원이다. 6장 4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부활시킨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남은 옛생명의 죽음을 나타낸다. 옛생명의 죽음은 회개하여 예수와 함께 죽은 자다. 옛생명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옛사람)을 말한다. 이는 원죄에 오염되었으므로, 옛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되지 않으면 새생명을 얻을 수 없다.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무 죄도 없는 그의 아들에게 엄청난 진노를 쏟아 부으셨다. 사실상 모든 죄인들에게 진노를 부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았다고 믿는 자는 하나님이 죄악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시는지 알 것이다. 그런데도『죄악 가운데 다시 살 수 있는가?』라는 말씀이다.
로마서 6장 2절에서『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 사람들은『육체가 있으므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을 받아드린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이렇게 말하는 자나 받아드리는 사람은 거듭남을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 속에 마음의 변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변화를 해야합니다 변화하는 삶을 사세요』라고 말한다. 다른 존재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다 이같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아닌 것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심판받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지 않는 자는 제자들처럼 십자가에서 다 도망가는 자가 된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자기 만의 고난의 길을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와 연합되라는 것이다. 죽은 예수와 연합될 때, 신령한 몸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게된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은 자기가 선택하는 삶이 아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은 이전의 육체를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그런 삶이 된다. 누구를 위해서 사는 삶이 되는가? 거듭난 자는 깨닫고, 그렇게 삶을 살게 된다.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성령께서 각자의 모양대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 핵심은 이 세상 끝날까지『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노아가 120년간 부르짖었듯이『모든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려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리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예수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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