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갈라디아서 6장 15절『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availeth any thing, nor uncircumcision, but a new creature. (kjv) 여기서 For in Christ Jesus가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다. 오직『그리스도 안에서』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새로 지으심』과 고린도후서의『새로운 피조물』은 같은 말씀이다.
구약시대 출애굽한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건너 광야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셨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모세는 1년 동안 가나안에서 지켜야 하는 율법을 가르쳤다. 성막을 짓게했다. 광야에서 지킨 절기는 유월절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했지만,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들어가면 죽는다』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 신약에서 가나안을『그리스도 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맹세하셨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옛사람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할례를 명하셨다. 할례는 육체를 베는 의식이다. 죽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씨를 믿는다는 표시다. 이게 약속을 따라 사는 삶, 영을 따라 사는 새생명이 되는 것이다. 옛사람은 죽어야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구원을 얻는다. 새창조의 피조물이 되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셨다. 새 창조의 시작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로 된 생명은 죽음 안에 있게 된다. 그러나 영생은 예수님의 부활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게 거듭난 자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거듭난 자도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부활이 된다. 거듭남은 새 피조물이요, 새 창조가 된다. 거듭난 자가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서 애굽을 나오는 것은 회개의 시작이다.『애굽을 나오는 것』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말하는『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가 된다.『애굽을 나오는 것』이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들을 부활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애굽을 나오는 것은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얻는다는 말씀이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을 나왔지만, 두 사람 외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신약으로 말하자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육체를 따라 난 자가 이스마엘이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이삭이다. 2000년 교회 역사가 그러했다. 교회 안에는 두가지의 생명이 존재한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자들을 핍박한다. 갈라디아서 4장 23-25절에서『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곳이고, 예루살렘은 율법을 보관하고 지키는 곳이다. 이렇게 율법을 받고, 지키는 것이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들이다. 신약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다. 교회 안에 육체를 따라 난 자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자들은 멸망당할 것이다. 오직 영을 따라 난 자가 구원이 된다. 영을 따라 난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
교회 안에서 거듭났다고 믿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얻지 못하면 다 『자기의 의』에 빠져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는 로마서 6장 7절에서 처럼『죽은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가 된다. 하나님이 자기의 의에 빠진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욥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단에 넘겨져 치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면 절망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멸망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의 의에 빠진 자는 탕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큰 아들이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존재다. 작은 아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탕자가 돌아온 모습은 집을 떠날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의 복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식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구원받는 것이다. 탕자는 죽은 자같이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한 것은 큰 아들에 대해서 말하기 위함이다. 큰 아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처럼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죽은 자같이 되지 않으면 성령을 따라 난자가 아니고 육체를 따라 난 자라는 것이다. 율법적 사고에 젖어 있는 자가 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율법적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오지 않은 자가 된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율법은 그물망에 걸린 물고기 처럼 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과 같은 것이다. 말씀 안에 거하는 자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다. 이게 성령을 따르는 자가 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모든 자들은 율법에 매여있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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