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
유다서 1장 3절『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서가 짦게 쓰여진 이유라고 말하는 것이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Beloved, when I gave all diligence to write unto you of the common salvation, it was needful for me to write unto you(kjv)는『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우리라는 말도 없고, 받은이라는 말도 없다. 단지『일반 구원 common salvation』이라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 민족이나 변함없는 구원을 말한다. 유다가 말하는 상황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그 시대상황을 말한다. 율법인 구약성경이 성경 전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을 근거로 오늘날을 적용하여 말씀을 전하면 결국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믿음의 초보에 해당되는 것이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우상을 섬기면 안된다』라고 했을 때, 믿지 않는 자는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교회 안에서도 우상을 섬기는 자가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게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마음 속에 숨어있는 탐욕이라는 우상이다. 신약의 말씀을 근거로 구약의 예를 든다면 충분조건이 되겠지만,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을 적용하면 일반구원론이 되어 성도에게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다는 이러한 것들을 상세하게 지적하고 싶지만, 이러던 차에 급히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유다가 급히 쓰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많은 교회에서는 일반구원에 대해서 주로 말하지, 단번에 주신 믿음에 대해서는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 대신 단번에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항상 말하고 있다. 단번에 주신 믿음과 단번에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주체는 엄연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는가, 아니면 내가 믿기로 한 것인가의 차이다.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이『싸우라』는 말은 마치 레스링 선수가 힘써 싸우는 모습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땀방울이 피방울처럼 되는 그런 모습이다. 그만큼 긴박한 상태에 놓인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믿음은 선물이라고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서『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는『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이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믿음이다. 믿음이 오지 않으면, 택함이 아니라 단지 부르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율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택함을 받은 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유다서 1장 5절에서『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출애굽 이야기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믿지 않는다』는 말은『가나안에 들어가면 약속의 땅을 주리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출애굽 당시의 약 200만명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들어가면 죽는다』라는 열정탐꾼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다 멸망당했다는 것을 유다가 인식시킨다. 그러면서 이런 자들은 사탄에 속한 자라는 것을 6-19절까지 길게 설명하는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 백성은 애굽에서 10가지 놀라운 기적을 보고,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그 속을 통과한 경험을 했으며, 광야에서 맛나를 먹는 신비한 체험도 했던 그런 자들이었지만『가나안에 들어가면 다 죽는다』라는 것이다. 민수기 14장 11절에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믿지 않는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광야에서의 신비한 체험은 구원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믿음의 선물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구원은 애굽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단번에 오는 믿음이 되어야만 구원받는다.
이 믿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믿음이다. 물은 이 땅에서 노아 때 홍수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성령은 죽은 자를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온 자는 이 땅에서는 십자가를 부여잡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열쇠는 교회 안에 있다.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이 땅에서 죽은 자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난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 성령의 능력으로 적과 싸우는 자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으면서, 이 땅에서는 악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죽은 자같이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영적인 적들과는 싸우는 것이다. 싸우는 자는 이 땅에 있는 육의 존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거듭난 자가 싸우는 것이다.
두 존재, 하나(육적인 몸)는 죽어있으며, 하나(신령한 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자는 요한1서 3장 9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육의 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듭남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믿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6절에서『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이 땅에서 회개하여 십자가를 부여잡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6절에서는『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신령한 몸을 입은 자가 이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이다. 육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죽어 있다. 5장 9절에서『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육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영적 전쟁의 연속 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박혀 죽은 자라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자가 회개한 자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단번에 주신다. 유다가『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싸워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게 만드는,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모든 악한 영적 존재들과 싸우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에게 필요한 것이 common salvation이 아니라, 복음의 긴박성이다. 교회는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와 있는데,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차이를 주로 말하는 것은 신도들 마음의 요구를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신도들이 긴박한 복음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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