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히 구별된 자
유다서 1장 1-3절『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는 야고보의 형제다.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므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었다. 그가 편지한 대상은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바로『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번역이 잘못되어 있다. kjv에는『them that are sanctified by God the Father』, 여기서『사랑을 얻고』가 아니라 『be sanctified』, 루터가 보았던 수용원문에는 헬라어로『하기오스 (ἅγιος)』로 되어 있다. 수용원문이 아닌 것에는『아가파오(사랑)』로 되어 있다. 즉 『거룩함을 입은 자가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이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유다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했다. 누군가가 성경을 계속 변개시켜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을 고문했다. 귀신을 쫒아내는 일들을 한다는 것 때문이다. 고문을 당한 사도바울은 깜깜한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찬양하며, 기도했다. 다른 죄수들도 다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이 보다 더 캄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교회는 기복신앙으로 가득찼으며, 하나님의 사랑 만을 강조하며,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으로 말하고, 회개를 죄 용서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주님은 옥문이 열리게 하셨다. 옥문이 열렸지만 바울은 나가지 않았다. 바울이 마케도니아에 갔을 때, 한 사람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간 곳이 빌립보였는데, 바울은 한 사람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바울이 고난 당할 때 그 대상을 찾았다는 말씀이다. 옥문이 열렸으므로 죄수가 도망간 것으로 생각하고, 간수가 자살하려고 했다. 간수가 자살하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는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너의 몸을 헤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빌립보 간수는 두려워서 떨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신다. 그래서 의로움을 입게된다. 회개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를 고백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그렇게 살게된 것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돌이키는 것은 그런 삶을 살도록 한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말하는『죽은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에게『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라고 말했을 때, 바울은『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다. 이게 회개하는『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것이다. 유다가『일반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 대해서, 급히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구원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의 대상이 있음을 말한다. 일반으로 얻는 구원과 단번에 얻는 믿음의 도를 설명하는 것이다.『일반으로 얻는 구원』은 변하지 않는 진리의 구원을 말한다. 구원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초보의 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에서 구원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에서 믿는 자는 자신이 결단해서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원과 회개는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단번에 얻는 믿음의 도』는 구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구원에 대해서 멀어지지 않도록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된다는 것이다. 유다서 1장 5절에서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셨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자를 광야에서 멸하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구원은 이 세상으로 부터 육체가 떠날 때까지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1장 6-19절에서처럼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영적 간음하는 자가 되고, 남을 비판하는 자가 되며, 잘 모르면서 비방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세상 불만을 토로하는 자가 되며,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좋아하는 그런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두가지의 형태로 나누어지고 있다.『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아니다』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처럼 여겨지게 하는 귀절이 많이 있다. 십자가의 예수님 우편 강도는 짧은 시간에 영원한 구원을 단번에 받았다. 빌립보 간수도 자살하려는 순간에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단번에 구원받는 믿음을 얻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동일한 회개가 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예수와 연합되는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열쇠인 십자가를 갖지 못한다. 구원은 육체를 떠날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마지막 육체의 죽음 앞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열쇠가 없다면 지나간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회개하기 전의 욥처럼 자기 의에 빠져 있던 자의 모습이다.
가롯유다는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포함하여 온갖 기적을 체험했다. 가롯유다는 돈을 좋아했다고 한다. 예수님과 함께 삼년을 살았지만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버렸던 자다. 아무리 성경지식이 많고, 영적 체험을 하고, 교회에서 칭찬받는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예수를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의로 다스린다는 말씀이다. 의로 다스린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가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인정 받지 않은 자는 다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인간의 죄성은 아무리 죄를 고백하고 뉘우쳐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직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자녀 삼아 주신다. 인간은 노아의 홍수 때 살았더라면 죽은 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을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이렇게 죽은 자임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인 것이다. 죽은 자이므로 당연히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된다. 로마서 7장 4절에서『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열매를 보고 다시 생각해야만 되는 것을 말씀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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