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되게 하셨다
사도행전 2장 33-36절『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를 하자 히브리인들이 마음에 찔렸다. 그래서『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말하면서 회개하게 된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하는 상황을 설명한다.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신다고 한다.『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술취한 것처럼 보였지만, 베드로는 이것은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이 말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 설교를 마친다.『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여기서『주께서와 내 주에게』 이 말은 앞의 부분은 하나님 아버지, 뒤의 주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다윗이 깨달은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은 것이 이삭이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된 것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이 말은 히브리서 1장 13절에서도『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10장 6절에서『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믿는 자가 주님께 온전히 복종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밑에 두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을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20-21절에서『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시고 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킬 때 그렇게 하신다는 설명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이 기간에 해당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널 때 그들이 한 것은 발걸음을 재촉한 것 외에는 없었다. 하나님이 홍해바다에서 애굽의 군대를 전멸시켜버린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로 인도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가나안은 직접 들어가 싸워서 쟁취해야만 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교회에 들어온 이후에는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악과 싸워서 쟁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 같은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광야는 파종할 수 없는 그런 땅이다. 그래서 애굽을 나온 많은 히브리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심판을 받았다. 옛사람이 죽지 않은 자는 생명의 씨앗을 심을 수 없는 광야에서의 삶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복종이 온전해 질 때까지 광야에서의 삶이 진행될 것이다. 여호사밧 왕은 적들이 눈 앞에 몰려왔을지라도, 주께 예배드리는 상황을 보게된다.
예배는 목숨을 건 예배를 하라는 것이다. 예배는 찬송하고, 설교듣고, 축도를 받는 그런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었음을 확인하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새사람이 된 것을 다시 확인하는 곳이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옛사람의 죽음인가 아니면 죄를 고백하는 곳인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면 죄의 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합당한 삶은 악과 싸워 이기는 삶이다.싸우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여호사밧의 경우처럼 목숨을 거는 전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예배를 먼저 드리라는 것이다. 주께 목숨을 거는 예배를 드릴 때, 복종이 온전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이 눈 앞에 올 때, 자신의 모든 방법을 내려놓고 주님께 매달린다.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온전하게 됨을 본다. 예배와 순종은 붙어있다. 구름기등이 머무는 것이 예배고, 구름기등이 떠 오르는 것이 순종이다.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주인이 구름기둥이 된다. 그러나 순종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옛사람은 두명을 제외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 오직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만 들어갔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이 전면에서 친히 싸워주신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하였으니, 우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우리의 복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예수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회개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원수를 복종시킬 수 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옛사람이 죽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세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가 그대로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과 동일시된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부활생명으로 일으키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히시는 것이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하나님 만을 의지할 때 이기는 전쟁이다. 사도요한은 요한1서 2장 13-14절에서『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이기는 자의 삶을 나타낸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이기는 자의 삶은 오직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복종될 때 일어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 모든 이론을 파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가장 핵심이 된다. 이게 옛사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내세울지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할 때 우리에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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