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은 구약에 있는 구원의 길이다


이사야 66장 1-2절『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과 같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심령은 영이다. 그런데 마치 주어인 것처럼 되어있지만, 영으로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 앞에서는 동일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세상에서 성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바로 영이 가난하지 못한 모습이다. 이 모습이 애굽 땅에서 히브리 백성에게 일어나는 모습이다. 그들의 삶은 노예였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이 땅에서 사는 삶은 사탄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서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갖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많은 경우,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삶 자체를 두고 보면 예수를 부인하는 삶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자랑하고 싶어서 못견디는 것이 육신의 마음이다. 히브리 백성은 노예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 이것이 영으로 가난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내 백성으로 나를 섬기도록 하라』고 하셨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유다.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며, 교감하며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닌 것이다. 백성들이 광야로 나오게 되었다. 그들의 죄가 광야에서 다 드러나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쫒겨날 수 밖에 없는 그 생명으로 사는 모습이다. 광야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에게 다가가신다.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 이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온유한 자가 되려면 영이 가난하고 애통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런 과정없이『내가 예수믿기로 했으니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구원관이다. 바울은『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가 회개의 완성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믿음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은 자가 된다.『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벡했던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두려움으로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육신적 두려움으로 인해서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반성하는 것을 넘어선다. 회개하면 예수를 버리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주는가? 누가 주인인가를 깨닫고, 자기부인의 실천하는 삶이 회개라는 것이다.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자가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호세아가『힘써 여호와를 바라보라』고 했다.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만을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바울도『전에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긴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놓칠 수 있는 삶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쁨의 근원이 세상에 있는지 하늘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애굽(세상)을 나와 광야로 들어갔으며,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삶이 된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광야는 단순히 믿음을 시험받고, 성화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모습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죄악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면 회개할 수 없게 된다. 죄악된 모습으로는 내가 아무리『믿습니다』라고 외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죄는 용서받을지라도 악은 죽어야만 한다. 악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옛사람이다. 히브리 백성의 옛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들만 가나안에 들어간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왜 옛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인가? 악이 죽지 않은,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육이 반응하게 된다.『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열정탐꾼이 가나안에서 거인인 아낙자손을 본 이유다. 육신은 세상의 상황에 두려워 떨지만,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게되는 것이다. 히브리 산파 두명은 바로왕의 명령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주님께 겸손한 자가 된다.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죄악으로부터 벗어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죄악가운데 살지 않는다. 만일 죄악가운데 산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낮아지고, 애통하며, 온유해지는 것이다. 죄악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주님에게만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온유해지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자는 주님에게 반응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사는 이유가 바로 말씀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머리 속에 많은 것을 넣어두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지식들이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든다. 하나님은『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들어가면 산다』고 말씀하셨는데,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했다. 다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하셨지만, 죽지도 않으면서『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예수의 피로 죄 용서받는다』라고 하는 것이다.『죄악과 싸우라』고 하는데,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예수의 피로 씻으면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루신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자들은 하나님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사해주셨는데, 이를 믿지 못하고,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으려고 한다. 매일 매일 죄를 용서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적용하고 있다.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대부분 거울에 비친 자신을 생각하면서, 상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 자신의 기준에 벗어나는 것을 말하면 사람들은 못견디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도 자기 기준에 안맞으면 못견디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그럼에도, 회개의 의미도 모르면서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쉽게 말하며,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자기가 주인인 셈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죄악된 삶에 대해서 애통해 할 때,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죄악된 삶을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위해 그들의 모든 세상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회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죽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게 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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