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장 32절『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부활하신 예수님이 떡을 떼어 축사하실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 버렸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이 32절과 같이 서로 말을 나누고 있었는데, 전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이 알아보셨을 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신 것이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갑자기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사라져버리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모습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죽을 수 없는 분이 육신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런 분이 왜 육신의 몸으로 태어나서 죽으셨는가? 사도바울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삼일간 앞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는 왜 예수님이 죽으셔서 부활하셨는가 이었다. 그는 자기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악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다.
사도바울은 율법에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백성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를 죽이는데 동참했다는 것이다. 그의 죄악성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죄악성이 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는가? 이 문제는 원죄와 연관이 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들은 자기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어둠으로부터 놓여질 때 이루어진다.
구원은 죄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악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게 원죄다. 사도행전에서 빌립집사에 의해 세례받은 마술장이 시몬과 같이 회개하지 않으면 악독이 가득한 자라고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다. 마술장이 시몬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세레받은 사람이었다. 사마리아』라고 말하면 모두가 비웃는 그런 대상자였다. 오늘날 믿고 세례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죄를 처리하기 전에 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오늘날 악으로부터 돌이키지도 않으면서, 계속 죄만 용서받으려고 하는 모습을 본다. 회개는 죄용서가 아니라, 악으로부터 돌이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4장 45-48절에서『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우리말 성경에는『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라고 말했으나, 영어 성경과 헬라어 수용원본에는『회개와 죄사함』으로 되어 있다. 우리말 성경은 마치 회개가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성경을 왜곡하게 만들면 마치 구약에서 아론의 두 아들이 제사에서 다른 향을 드리다가 죽게된 것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은『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회개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만 한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죄를 고백해도 죄악 가운데 그대로 있다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길 외에는 없는 것이다.
죄를 일으키는 악이 죽어야만 한다.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짖는 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신다. 죄악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자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회개하면 주님은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신다. 이 일이 일어나야만 구원의 확신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믿음 때문에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으로 믿음 속에서 살게된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믿음은 부패한 인간들에게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제사에 드리다가 죽었다. 그 모습을 백성들은 다 지켜보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나, 가나안 땅 앞에서 열두명의 정탐꾼을 40일간 보냈다. 그런데 두 정탐꾼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백성들 중 두 정탐꾼의 말을 믿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오늘의 현실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어도 육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옛사람(죄성:악)은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육체의 생각은『절대 죽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열명의 정탐꾼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어도 다른 불을 드리는 아론의 두 아들처럼 성경의 말씀을 왜곡시킨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 것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는 정작 자신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죄악성을 발견하는 자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고민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이 내면 속에 있던 죄악으로 인하여 못박히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죄악의 죽음을 받아드린다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지 살아나지 못하게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매일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얻어 싸우는 것이다. 성경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한다.
예수님과 함께 못박힐 때,『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다』는 그 의미가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못박힐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날 전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전하는 사람은 자기가 주인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회개하여 악으로부터 돌이킨 사람이 그 말을 전할 때, 믿게 되지 않겠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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