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마가복음 1장 14-15절『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구원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름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노아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뉴스를 접하여 흉악한 사건을 바라볼 때,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지만, 사건의 크고 작음에 있지 누구나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복음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주님이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는 자는 그 자가 먼저 노아때처럼 하나님이 죽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그 열매의 결과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한가지를 빼버린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노아 때처럼 하나님이 죽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빼버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라는 등의 거짓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이 믿음이 혼란을 주고 있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를 먼저 말하지 않고, 믿음만 말한다면 가짜 복음에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죄악가운데 있는 인간은 다 그렇다는 것이다. 죄악된 것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16장 14절에서『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예수를 믿고 삼년을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에게 꾸짖는 것이다. 예수님은『죽었다가 삼일후에 살아나리라』라고 말한 것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의 믿음은 자기가 믿을 만한 것만 믿는 것이다.
제자들은『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리라』라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믿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오병이어의 기적, 풍랑 위를 걷는 예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과 문둥병을 고치시는 일 등 수많은 기적을 보고 다 믿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부활도 믿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완악한 제자들을 꾸짖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생명의 부활도 없는 것이다. 회개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인간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애굽을 나오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오늘날 교회에 앉아 있지만 애굽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애굽을 나와 기적의 홍해바다를 건넌 사람들도 있으며, 애굽을 나왔지만 광야에서 헤메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 앞에서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도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믿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은 열매로 나타난다.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명예와 권력에 도취하며, 죄를 지어도 예수의 피를 의지하기 때문에, 죄악에 대해서 무감각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는 자는 혼자 있어도 죄짓지 않는다. 그들은 죄가 율법의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우신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를 모른다』할 것이다. 예수님은『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고 말씀하셨다. 가족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가족을 사랑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재물과 내적으로는 자아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핵심은 재물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바알신과 아스다롯이다. 이게 계시록에서 짐승과 음녀로 표현된다. 이 두가지 우상을 버리지 않는다면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재물과 자아의 문제다. 이 두가지가 자리잡고 있다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예수를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자기 혼자 그렇게 믿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가 된다. 우상을 버리는 자가 회개한 자다. 교회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애굽을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경배받지 않으셨다. 회개없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회개했다고 말하지만 회개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회개의 기준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죄를 자백하고 반성하면 회개했다고 생각한다. 죄에 대해서 회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과 반성을 회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고 로마서 6장 7절에서는 말한다.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누가 죽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믿는 자인가? 회개하는 자는 이것을 깨닫는 자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는 네가지 밭의 비유에서 처럼,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시지 않는다. 오직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자에게만 계시하시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에 들어서는 자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가 된다. 재물과 자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자가 된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회개에 대해서 말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여기서 2장 38절의『세례』와 3장 19절의『돌이켜』라는 말이 연결된다. 둘 다 수동태다.『be baptized(죽음)』,『be converted(거듭남)』예수와 함께 죽으므로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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