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거듭남에 대해서
사도행전 3장 19-21절『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사도 베드로가 구원에 대해서 네 가지를 설명했다.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된다. 회개는 repent를 말하며, 돌이켜는 be converted, 생명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면 주님이 죄를 씻어주신다.『새롭게 되는 날』에 대해서는 헬라어로, 아나(again)와 푸쉬케(soul)의 결합 용어다. 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정하신 구원자, 곧 예수를 보내신다. 이 말씀은 재림 예수를 말한다. 주님은 만물을 회복하실 때에 오신다. 만물의 회복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거듭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때를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밭의 비유를 하셨다.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앗은 천국의 자녀들이다. 가라지는 악한 자(사탄)의 자녀들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가 사탄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천국에서 이미 천사들이 교만해서 타락하여 쫒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끝에 천사들을 보내서 추수하러 온다는 것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 것 같이 주님은 세상 끝에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천국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들이 존재한다. 세상에서 천국의 자녀들이 주님의 나라를 회복해야만 한다. 이 땅에서 만물의 회복이 바로 새 창조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서 구원하는 길을 만드셨다. 그 첫번째의 시작이 회개다. 회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죄악에 대해서 버리고 죽는 것이다. 죄를 버리고(회개), 죄사함을 받는 사이에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be converted(거듭남)이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다.
사도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했다. 성경을 아는 자(유대인)나 성경을 모르는 자(헬라인)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설파했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오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마치 절차라도 되는듯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라도 거쳐야만 죄를 용서받는 것처럼 생각한다. 인생을 살면서 지은 죄를 다 기억하고, 다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러나 회개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회개를 말한 다음『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설파했는데, 그냥 예수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주가 되는 믿음 만이 참 믿음이다. 주가 되는 자는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가 적용된다. 여기에도 네 가지를 말한다. 눈을 뜨게하고,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믿어 거룩하게 되어 기업을 얻게 한다는 말이다.
회개하는 자는 눈이 뜨지며, 어둠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빛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눈이 뜨지기 전에는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주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배는 회개가 아니라 회개한 자가 드리는 마음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눈으로 보지 않고, 단지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했던 다윗을 불쌍히 여기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회개의 기회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지않고 강물처럼 흘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말렉을 죽이지 않고 돌아온 사울에게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 얍복강 앞에서 주님이 야곱을 불쌍히 여기셔서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알 수 없는 긍휼이시다.
회개하는 야곱에게 주님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회개와 거듭남은 다르다. 그러나 분리되지 않는다. 회개하면 거듭나지만 회개없는 거듭남은 없는 것이다. 거듭나야만 죄 사함을 얻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문제다. 회개를 죄의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지난 주에 죄를 지었습니다.』이제 고백했으니『죄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눈물로 죄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또 죄를 짓는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또 참회를 하는 것이다.
자아라는 자기 정체성은 결코 바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버려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정체성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서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성령님이 이끌지 않으면 안된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는 자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자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다시는『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살지않게 된다. 오직 주인을 위해서 살게되는 것이다. 주인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시다. 그 분과 연합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운 것이다.
거듭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일 죄를 지을 것을 염려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가 생각하는 자도 여전히 죄인에 머물러 있는 자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뱀에 물리지 않게 뱀의 독의 조심해야만 한다. 회개하고 거듭난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다. 이것이 바로 사망이 생명에게 먹힌바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썩은 웅덩이와 같지만, 이 웅덩이가 생명의 바다를 만나면 삼켜버리게 된다. 웅덩이는 사라지고 바다에 연합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3-9절에서『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대담하여 몸에 거할 때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노아의 시대, 하나님은 인간들이 어린아이건 어른이건『그들이 계획하는 바가 모두 악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8명을 제외하고 모두 멸망시켰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의 계획하는 바가 악하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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