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복종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
고린도후서 10장 4절『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가나안에는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이 살고 있었다. 육체적인 조건으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백성으로 하여금 예배하라』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어떤 견고한 진도 하나님이 무너뜨린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백성은 보잘 것 없는 육신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발할 때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마치 흙덩이에 불과한 달이 해의 빛을 받아서 반사될 때, 달덩이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1년이 지나서 하나님은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주만 바라보도록 했지만, 정작 가나안 앞에 섰을 때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열정탐꾼의 말이 귀에 들어온 것이다. 주님은『전심으로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전심으로 향하는 자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말한다.『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모세가 백성들에게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리라』인간의 이성은 뱀에게 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놋뱀을 향한다. 자신이 육에 반응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십자가를 향한 마음이 열린다. 십자가 속에서 주님 만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이다. 그 속에서 예배할 때, 육체의 이성은 『너는 죽어, 어리섞은 자여』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는 주님이 함께 하셔서, 승리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 승리를 경험한다. 이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자는『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라고 결정해 버린다. 판단과 분별 이전에 순종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5절에서『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오병이어의 기적에 앞서 예수님이 빌립에게 시험하시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장 7절에서『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말했다. 이성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안드레라는 제자가 예수께 나아와,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안드레는 이성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지만, 일단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한 것이다. 오늘날도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순종하지 않는 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이성과 경험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비밀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가? 가나안 땅 앞에서,『들어가면 약속의 땅을 준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출애굽할 때 백성들중 두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과 경험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가 된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인가?
성경에서『옛생명이 예수와 함께 죽으면,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는데도, 이성과 경험으로 판단할 때, 말도 안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반대의 말씀을 하셨다.『죽어야 산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순종해야만 하는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고린도후서 10장 6절에서『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여기서『복종』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가 가나안이다.『가나안』이라는 말은 복종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라는 말씀이다.『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복종하지 않는 자들, 아낙자손이건, 앞을 가로막는 모든 대적들을 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복종할 때, 말씀을 가로막는 모든 악한 것들을 부셔버린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말이 여호수아 14장 9절에서도 나타난다.『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면,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것이다. 가나안에 아낙자손이 살고 있었다. 이성과 경험은 아낙자손에 반응한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한다. 이성에 반응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가? 그 이유는 두려움에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낙자손을 두려워하는가의 차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한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자기가 신인 것이다. 자기의 경험과 생각대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교회에 앉아있어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결국 언젠가는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나타날 상황이 오고야 말 것이다.『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0장 35-37절에서『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인내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은 더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를 향해 달려간다. 히브리서 10장 39절에서『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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