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낸 자가 영접한다
요한복음1장 12-13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아무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어 거듭난 자를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세상을 이기고, 죄 가운데서 살지 않는 자들이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고, 요한1서에서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왜 이렇게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된 세상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상 사랑은 결국 세상을 파괴하는데 동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세상의 지배를 원한다. 그래서 끝없이 죄를 짓는다.
요한복음 20장 29-31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후에 요한이 쓴 이야기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부활하신 것을 보지 않고 믿으면 생명을 얻게하신다. 오늘날도 대부분 다 믿는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생각으로 믿지만, 그 열매로는 믿지 않는 결과를 볼 수 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가나안 땅 앞에서 약속을 땅을 준다고 했는데, 두명을 제외한 아낙자손이 두려워,『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한 히브리 백성들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누가 거짓말한 것인가? 열정탐꾼은 진실을 말한 것처럼 여겼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고, 백성들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열정탐꾼은 지도자 급이다. 각 지파에서 1명의 대표를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거짓말한 것이다. 속이려고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육이 반응하므로 결국 거짓말한 것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3장 16-19절에서『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여기서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와 믿지 아니한 자는 같은 말이다. 믿음의 결과가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같은 단어(피스티스)다. 그런데 영어성경에는 절반씩 섞어서 번역하였다. 왜 그렇게 했는가? 믿음이라는 헬라어 명사는 피스티스(영어:faith)이지만, 헬라어의 동사(피스튜오)는 영어의 faith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번역하기 위해서 영어로 believe in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faith와 believe in은 차이가 있다. 앞의 단어는 순종하는 믿음인데, 뒤의 것은 순종하지 않는 믿음, 단지 인식하고 있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에서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순종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인식한다는 믿음인가? 교회에 처음 초대받아서 부르심을 얻는 자의 믿음은 거의 인식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 된다. 인식하는 믿음과 순종하는 믿음 사이에 회개가 있다. 인식하는 믿음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돌이키기 위해서는 육으로 반응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도마가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믿음과 오늘날도 말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그 믿음은 둘다 인식하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순종하는 믿음 만이 생명을 얻게하는 거듭남의 믿음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힘입게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택하심을 얻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야만 택하심을 입는다. 의례적인 세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가 새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할례는 육의 죽음을 상징한다.
누가복음 16장 29-31절에서『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회개하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음부의 이야기를 해줘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지옥 간 자의 깨달음이다.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자는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으므로 육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육에 반응하는 자들로 가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야만 새언약을 체결할 수 있는데, 죽지 않고 언약에 참여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의 죄성은 변하지 않는다. 가나안 땅 앞에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죄악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는 자들이나 같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으면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믿지 않는 것은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라고 말하는데도,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이 회개하는 자의 죄를 그의 피로 다 사해주셨다고 믿으면, 죄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고 부패하였을 때, 부족한 자를 선지자로 세웠다. 호세아의 처는 음란한 여자였다. 아모스는 목동이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겸손하게 돌아오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회개하는 자가 겸손한 자가 된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회개없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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