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함을 받아야 사함을 받는다
레위기 23장 26-29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속죄일은『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이다. 나팔절부터 10일간은 고통과 환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10일간이 끝나면 속죄절이 되고, 속죄절 5일 후에 초막절이 시작된다. 나팔절은 추수가 끝났다는 의미다. 오순절부터 넉달동안 추수가 완전히 끝나서 나팔을 분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리고 나팔절에 공중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는 정확한 날과 때는 알 수 없다.
레위기에 다섯가지의 제사가 나오는데, 레위기 4장 20절에서『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다섯가지의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끝에는 반드시『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속죄의『속』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em(도로 사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서 『곧』이라는 말은 속량과 죄 사함이 동의어의 개념이 아니라,『이어서』라는 개념이다. 속량이 있어야,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속량은 레위기 4장 20절의『속』을 인용한 것이다. 속량은 대속, 구속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구입(Purchase)한 후에 해방(delieve)된다는 말이다. 죄를 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죄인을 사서 해방되는 것이 먼저다. 이것의 개념이 바로 욤키프러다.
창세기 6장 4절에서『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욤키프러의 명사형이 역청이다.『칠하라(덮으라)』는 말이 카파르다. 구약시대 성소 마당에 놋 제단이 있었다. 어린양에게 안수를 하면서 모든 죄를 전가시킨다. 이것도 redeem이라는 단어다. 그래서 죽은 어린양과 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게 회개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속죄가 된다. 그 다음에 물두멍 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어준다. 씻은 다음에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 안에는 덮개가 있는데, 이 덮개가 바로 이 단어다. 지성소에는 1년에 한번(음력 7월 10일) 들어가는데,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라고도 하고 시은소라고도 하는 덮개(히브리어로 코페르트:은혜로 덮었다는 뜻)가 있다.
모든 죄인들의 죄를 덮는 날이 바로 욤키프러였다. 그래서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시은소 위에 피를 뿌려, 그 피가 덮어지는 것이다. 신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죄인들을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휘장이 찟어짐) 부활하셔서, 대제사장으로서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갔으므로,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사탄으로부터 피값으로 죄인을 사는 것이다.
『속』이라는 말은 덮혀지는 것(카파르)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덮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속량이 없는 죄 사함은 없다. 하나님이 사는 자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해서 사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자기 아들의 죽음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오늘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든가,『예수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단순히 말한다면 곤란한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어둠(악)에 빠져 있던 자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괴로움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둠에서 건져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를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그렇게 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지도 않았는데, 인간이 믿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위약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속량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욥기 19장 25절에서『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오늘날도 욥처럼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하락하셨다. 그래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자를 구속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서『대속』이라는 말은『가알』이라는 말이다. 룻기에서 룻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은 남편의 땅을 대신 지불하여 사줄 수 있어야 한다. 사주는 것은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고, redeemer라는 단어다. redeemer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세가지가 있다.『코페르, 파다, 가알』이다. 포로나 노예를 대가를 주고 사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이다.
히브리 백성이 바로의 압제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을 출애굽기 6장 6절에서『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신명기 7장 8절에서도『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속량이 해방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4장 5절에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인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사탄의 종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어서, 죄악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런데 죄를 깨닫지만, 자신이 악 가운데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회개한 자가 아니다. 죄의 문제보다도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이 악이 옛사람이다. 악이 바로 탐심이라는 것이다. 회개는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회개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날마다 악에 대해서 죽는 자가 바로 회개하는 자가 된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 잘하고, 날마다 죄를 반성해도, 명쾌하지 않은 이유는 악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또 죄를 짓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악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여전히 탐심이 마음을 휘어잡는다. 회개해야만 속하여지고, 죄사함을 얻는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