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로마서 1장 17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좋은 소식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죄인에게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모든 죄악이 그치게 된다. 회개하는 자는 이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회개는 내가 하나님께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고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못박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의를 먼저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말한다면 가짜 복음이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도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들은『하나님을 섬기고, 세상도 섬긴다』고 말한다. 예수님은『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말하는 것이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는『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그들이 섬기는 세상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 노아가 120년간『회개하라』고 외친 것처럼,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는『하나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선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먼저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죄인들은 하나님이 사랑을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버릴 것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을 주었지만, 그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가 버렸다. 물론 죽은 자같이 되어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왜 죽으셨는가? 나의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근본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나의 죄때문에 죽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과 마주치면, 하나님을 버릴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어둠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보면 알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알게된다. 로마서 3장 5절에서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사람들이 바울을 불의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바울이 대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 사랑을 먼저 구하고 있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원하고 있다. 성령을 추구하는 자는 은사와 계시와 능력을 추구한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하나님이 축복을 준다해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이다. 작은 고난이 몰려와도 하나님을 떠나버린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진노였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8명을 제외하고 다 죽었다. 노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있다고 말한다. 오직 의인만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다. 큰 죄이던, 작은 죄이던 그 해결방법은『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라는 것이다.『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핵심은 누가 주인인가다.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의를 받을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죄인들이 너무나 당당한 모습들이다. 죄인들이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는다는 것을 생각한다. 예수님도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도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의인답게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여러분들은 이제 의인입니다』라고 선포해 버린다. 그러나『여러분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날마다 죽노라』가 없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 자만 하나님의 의를 알게된다. 노아가 만든 캄캄한 방주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때 방주에 구원이 있음을 알게된다.『날마다 죽노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때, 십자가가 구원이 됨을 알게된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로 들어가는 자가 구원을 받게된다. 노아의 방주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렸을 때부터 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수로 다 심판할 만큼 악하다는 것이다.

바울은『이렇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욥은『악에서 떠난 자이고, 예배에 온전한 자』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런 욥에게 내리신 고통에 대해서『하나님이 불의하시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욥이 불의한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욥 때문에 죽은 아들들은 무슨 연고로 죽었는가? 하나님은 욥과 욥의 아들들에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좀 심한 분이고, 무서운 분이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게 복음의 시작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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