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로마서 4장 2-3절『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믿었다. 그래서『의롭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신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믿음은 내가 믿기로 한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의 믿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회개와 거듭남과 믿음은 연결되어 있다.
회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 자만 예수님의 부활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례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이 일이 일어났는가 아닌가가 구원의 관건이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옛사람을 수선하려고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사울이라는 모습이 바로 이런 상태다. 그는 율법에는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자기의 의』라고 한다. 은혜는『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만 은혜가 역사하는 것이다.
욥은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예배를 드리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말해주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쌓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욥기의 절망없이는, 시편의 은혜가 없다는 것을 성경은 순서를 통해서도 보여준다.『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야고보서의 시작도 욥처럼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는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의 5장에서 욥의 인내를 말한다.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위해 노력을 해도,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5장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로마서 4장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믿다보니, 믿음과 거듭남의 연결고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연결고리가 없으면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삶 속에서는 거듭난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고 율법아래 있는 것이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로마서 4장 19-22절에서『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약속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차이다.
99세때는 약속을 믿지 않고 속으로 웃었다. 75세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났지만, 24년간은 완전한 순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신다.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었었는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받아드릴 수 있는 것만 받아드린다. 자기 생각에 믿어질만한 것만 받아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내적 속성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적 속성이 변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다 도망간 제자들과 같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자기의 의를 쌓는, 자기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삶이 된다. 회개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게 아브라함의 백세 때의 이야기다.『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가 된다. 회개의 죽음없이 하나님이 그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는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놋 제단에서 죽어야만 한다. 죄인이 죽어야만 한다. 그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다만 어린양을 대신 할 뿐이다. 그 어린양과 죄인이 연합되어야만 죽은 것이다. 죄인과 어린양이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하면 죽은 것이 아니라, 죄를 씻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게 된다. 회개는 이렇게 죽는 것이다. 회개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자가 된다. 이런 회개없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다 회개했다고 말한다. 죄를 고백하고, 날마다 회개한다는 것이다.
회개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지 밭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시고, 이사야서를 인용해서『저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깨닫고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한다』고 말씀하신다. 깨닫고 죄사함을 얻으면 좋은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 이유는 회개하지 않으면 이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관건은 옛사람의 옷을 벗는 회개지, 자기가 믿는 믿음이 아니다. 회개한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믿음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옛사람의 옷을 벗는 회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중세때의 가짜 복음이 면죄부가 되듯이, 오늘날은 회개없는 영접기도가 가짜 복음이 된다.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은 것 같이 된 백세 때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5장 1절에서는『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를 말하면서, 이 화평에 들어가기 위해서, 6장에서는 세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옛사람이 죽은 것을 말한다. 화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먼저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으로 부활된다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의가 된다. 그래서 6장 전체가 의로움에 대해서 설명하신다.
세례는『회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가 행하는 의식이다. 6장 7절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죽은 자는 옛사람의 죽음을 나타낸다. 이게 거듭남이다. 세례의 의미는 6장 3-4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이며,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지 못하므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죽은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게 세례다.
회개의 의미를 축소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강조하다보면 스스로 연합된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옛사람의 옷을 벗지 않으면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결국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게 된다.
욥기 40장 8절에서『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가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많은 교회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내세우기 위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경험을 한 히브리 백성들도 이 원망죄를 이기지 못했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5절에서『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가 된다. 옛사람이 예수와 죽지 않으면, 모두가 다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결국 상황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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