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누가복음12장33-34절에서『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런 제목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헌금을 많이 하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구약에서『하나님께 무엇인가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멸하여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짐승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몸을 드리는 것은 몸이 하나님 앞에서 멸하여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구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 중 태워지지 않은 것은『연보』라는 창고에 보관하여 구별하였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태우는 것, 즉 죽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의 그림자인 것이다. 십일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뜻이 들어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 중 불에 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사장 등 레위지파 사람들이나, 고아나 과부 등을 위하여 쓰이게 된 것이다.『바친다』라는 말은 구약의 마지막에 끝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개념은 끝난 것이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린다』는 말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서 드리고 불에 태웠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말이 맞지않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나를 바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아가는 것이다. 즉 내 속에 있는 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내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교회에 기부하여 사용되어 지도록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으며,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예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받은 적이 없다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잡신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예물을 드렸다고 우기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데,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한 진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영이다. 헌금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을 드리는 것은 곧 내가 예수와 더불어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인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금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금하는 것이 다른 것인가? 분명히 다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 태워 없애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일을 예수님이 완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이제 예수님이 완성하신 일을 믿지않고 뭔가 또 하나님께 바쳐 태워 없애는 일을 행하는 것을 해서는 안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요한복음 6장 38~40절에서『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헌금을 하면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연결하여, 많은 신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헌금을 하는 것이다. 하늘에 보화를 쌓은 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19장 21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헌금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의미가 다르다. 어떤 교회에서는『구약시대의 십일조가 신약시대는 연보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은 헌금이라고 했는데, 교회 사람들은 연보라고 말한다. 연보와 헌금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연보라는 말은 구약시대에서 사용되었으며, 연보궤는 구약시대에서는 보물창고, 국고창고의 개념이다. 히브리어는 리시카, 헬라어는 가조필라케오로 번역되었으며, 하나님의 성전 뜰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창고를 말하는 것이다. 신약시대 교회에 작은 헌금통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역대하 34장 9-10, 14절에서 연보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연보궤 안에는 온갖 십일조와 헌물들이 있었던 창고였던 것이다. 히브리어의 보는『들어오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예물창고에 들어온 모든 것이 연보 라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도 연보궤에 들어있는 것 중의 일부였다. 그러니까『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의 연보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약시대에서 연보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개념과는 다르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십일조와 헌물들을 연보궤에 모아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서 그 예물을 하나님 성전 맡은 자(레위지파)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연보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고 헌금이라고 했다. 예물은 히브리어는 고르반, 민하로 사용되었다. 사도바울은 전도를 할 때, 자비량으로 생계를 꾸렸다. 신약시대에서 헌금으로 생활비를 준다든가,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도운 것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헬라어『도론』이라는 말은 헌금으로 번역된 것이다. 헌금이라는 말도 예물이라는 의미가 많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헌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4장 32-37절을 보면 모든 무리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이 되면 다 돌려주어야 하는데, 이 때 당시에 초대교회 제자들은 예수님이『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는데, 종말이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하니 땅을 다 팔아 사도들에게 바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전 재산을 팔아서 바치겠다(히브리어:고르반)고 했는데, 아까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부를 감추었다. 감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횡령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어버렸다.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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