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장 25-27절)

사도바울이『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지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누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누가는『이방인의 때』라고 했다.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방인이 다 구원 받을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도바울이『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 이방인의 수와 누가가 말한『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에서 이방인의 때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원의 개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영이 있다. 영은 육신 안에 거하지만 원래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육신)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하나님 나라)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라고 했다. 육신이 죽으면『영이 빠져 나와 무엇인가를 덧입어야 한다』라는 말이다.『하나님 나라 집을 간절히 입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벌거벗은 것으로 발견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계속 말하고 있다. 구원은 바로 육은 죽고, 영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 영의 몸을 입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돌아온 탕자』로 비유하고는 한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죽었다가 살아난 내 아들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떠날 때 악한 아들의 모습은 죽고, 다시 태어난 회개의 아들로 돌아온 내용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돌아온 탕자와 비교해서 재 구성해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이 사탄을 좇아갔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참된 회개와『육신 속에 나타난 악(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영의 몸을 입은 자를 말한다. 이러한 영의 구원은 이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천하만민의 모델로 삼고 모든 민족이 바라보고, 깨닫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씨의 약속을 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씨의 약속은 천하만민을 위한 씨의 약속이다.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도 이방에 대한 씨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이사야 42장 1절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그리스도),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리고 이사야서 49장 6절에도『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스라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방에 대한 구원이요, 구원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찾도록 했지만 실패하고, 이제는 이방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구원은『영이 구원받는 것』이며, 육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육체를 가진 생명체는 죽어야 하는데, 단지 육체가 죽을 때 까지 인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나 육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 속에서 나타난 옛사람이 악한 것이다. 그래서『죽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악한 마음이 예수님과 십자가 위에서 함께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을 떠난 천하만민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이 말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사야서 61장 1-2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한다고 했다.
 은혜의 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신원의 날은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회복 때,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마지막 환란을 말한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도 은혜의 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렛 지방의 한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서를 읽고『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할 때는『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말했지만 누가는 신원의 날을 말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15장16-17절에서『이 후에 내(그리스도)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리니(아모스9장11절을 인용),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예수님 승천 이후에 약 2000여년의 기간을 주셨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니엘이 말하는 바 69 이레와 70 이레의 시작점 사이에는 상당한 기간이 연결되지 않은채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방인의 전도는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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