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2)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의 모든 초점을 에덴동산에 맞추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는데, 12절에 『이러므로』라고 이야기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받는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 신학이라는 범주의 인간론에서 영의 기원에 관한 학설이 세가지가 있다. 창조설, 유전설, 선재설 세가지가 있다. 대개 교회에서는 창조설을 믿는다. 즉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하나님이 영을 넣어준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데, 하나님이 맑고 순수하게 창조한 영이 육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죄인이 되는가? 창조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영이 태어나자 마자 죄있는 영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창조설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죄있는 영이 되도록 하셨는데,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맑고 순수한 영이 인간의 육체에 들어가면 죄로 더러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말밖에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을『맑은 영이 더러운 영으로 되게 한』간접책임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창조설을 믿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선재설은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존재했으며, 하나님이 이들을 육에 넣어준다는 개념이다. 베드로후서 2장 4절과 유다서 1장 6절의 말씀이 여기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대속하게 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영의 세계는 자유세계이고, 물질세계는 매여있는 세계다. 영은 영의 세계에서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이 육에 있는 것은 매여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이 범죄했기 때문에 육체(옥)에 가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영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이 학설은 마치 인간이 전생이 있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간의 전생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영의 선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번째는 영의 유전설인데, 부모로부터 유전된다는 학설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 학설은 맞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나 신학대학교에서는 영의 창조설을 받아드린다. 그러나 영의 창조설에 대해서도 문제점이 있지만, 영의 선재설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첫단추를 잘못 꿰면, 전체의 그림이 흩어러지게 된다. 창세기 1-3장의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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