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거하면


요한1서 1장 5-10절『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교회 사람들은 이 말을『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에서 악한 행동을 하게되면』 이라고 받아드릴지도 모른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에 대해서 화답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아멘하면서 그것으로 끝내면 안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19절에서『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두렵게 여겨지므로 모세 (율법)뒤에 숨었다.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아멘 하지만, 하나님께 직접 화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 뒤에 숨어서 자기의 의를 쌓는 것 뿐이다. 
율법에 갇힌 자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알아서 믿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을 찾고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전하지 않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빛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 빛을 전해야만 사귐이 있는 자가 된다. 

요한복음 1장 9-11절에서『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리고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 땅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화답하지 않았다. 자기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자기의 의에 충만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있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증거하신다. 성도가 그 믿음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도 스스로 개인이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야기만 한다면, 빛에 거하는 자가 아니고 어둠에 거하는 자가 될 것이다. 빛에 거하는 자는 성령께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사귐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다.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냥 그대로 두면 어둠에 있는 자가 된다. 성찬을 할 때 떡을 떼고 잔을 마신다. 그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교제인 것이다. 교회에서의 교제는 친목도모가 아니라,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드러나지 못하면, 그들은 빛에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교제를 하기를 거부했다. 이스라엘이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밝히 드러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묶혀두고, 자기들 스스로 의를 이루는데만 온 힘을 썼다. 이렇게 교제를 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짝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로마서 10장 21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화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빛이신 주님의 말씀에 화답하지 않으므로 어둠에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종일 팔을 벌리고 있는데 오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들(이방인)에게 가는 것이다. 

빛이 대상에 비춰져서 빛이 반사되지 않으면, 그 대상은 검은 색과 같은 어둠이다. 빛이 어둠에 비춰지면 어둠은 물러갈지라도, 그 빛이 반사되지는 않는다. 빛이 반사되지 않으면, 성도간의 교제가 없는 것이다. 빛이 비춰져서 어둠에 있던 성도가 빛이 되어 그 빛을 반사시켜, 다른 이들에게 비추어야만 교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교제가 일어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결국 율법 아래 갇히는 자가 될 것이다. 혼자서 자기의 의만 키우는 자가 될 것이다. 

사람은 빛의 알갱이를 볼 수 없다. 빛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은 하지만 눈으로 빛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가 온 뒤에 물방울에 비친 무지개를 볼 수 있는데, 이 무지개를 통해서 빛의 모습을 잠깐 인식할 수 있다. 일곱가지를 나타내는 무지개가 율법이라면, 그 무지개를 통해서 감추어진 흰 빛은 생명의 빛이 될 것이다. 일곱가지 무지개의 색깔은 인간들의 의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즉 율법에 갇힌 자의 모습인 것이다. 무지개를 통해서 인간들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깨달아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무지개를 통해서 참빛이 있음을 깨달아야만 하는데, 무지개를 통해서 빛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 말씀을 받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약속의 말씀을 증거하면 참 빛이 되지만, 하나님 말씀을 받았으면서도,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바로 무지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을 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심판이 있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말씀을 선포하지 않는 자들은 빛에 거하는 자가 아니라 어둠에 거하는 자다. 말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하지 않으므로 어둠에 있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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