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장 23-27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장 이전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이 소개된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도『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이렿게 묻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믿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는 믿음은 나의 죽음과 결부되지 못한다.『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그 문이 좁고 협착해서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찾는 자도 적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만 이 문을 찾게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좁고 어렵기 때문에 이 문을 싫어한다. 

문이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평생 예배한다고 반드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제자들도 되지 않았다. 구원이 쉽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것이다. 구원이 쉬워보이는 길은 멸망 길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는『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셔도, 사람들 스스로 회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이 문장 중『어디에서』라는 말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단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모르는 사람이 된다. 거듭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력과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형질이 바뀌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은 것처럼 없던 생명이 생겨야만 되는 것이다. 그 해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다. 그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비라는 말이다.『거듭나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남을 살리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도 구원받는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씨앗을 뿌려서 생명으로 꽃피우지 못하면 죽어있는 것이다. 남을 살리지 못하는 생명은 죽어있는 생명과 같다. 비록『남의 생명을 살리지 못하더라도 나는 구원받는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섞은 생각일 뿐이다. 마태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으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 전에는『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지 않으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님을 시인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삼년이 지났는데, 예수님이『오늘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강하게 부인했다.『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이 말은 자기의 의지에 불과하다. 회개하지 않으면 의지와 확신은 넘어지고 만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로부터 났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분간되지 못하면 소경에 불과하다. 자기 확신과 주님이 주시는 믿음은 다르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 외에는 오지 않는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께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자기에서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자기』라는 말은 자기 확신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가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자기 확신이다. 오직 주님 만을 따르는 것이 회개다. 주님을 믿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라는 존재가 주님을 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욥기 42장 5절에서 잘 나타난다.『내가 이제는 주님을 눈으로 보나이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회개하는 자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미워한다. 이게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베드로가 삼년 동안 기적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이『나는 죽는다』라는 말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냥 예수를 믿는 것이다. 회개한 자,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거듭난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서『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했다. 회개하기 전에는 주님께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 먼저다. 주님은 성경 전체에서『나를 믿으라』가 아니라『회개하라』고 먼저 말씀하셨다.『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회개한 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가 죽었다.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갔으며, 부자는 음부에 갔다고 했다. 그 지옥에 간 자가『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나사로가 살아나면 믿을거라는 것이다. 16장 29-31절에서『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회개는 기적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개는 모세와 선지자가 이미 말한 것을 보면 다 안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거라는 것이다. 물론 믿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한다는 보장은 없다. 구원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에 달려있다. 우리는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먼저 전해야만 회개를 외칠 수 있다. 이게 구원의 길이다. 믿음은 씻음이지만 구원은 죽음이다. 믿음은 예수님 보혈의 공로와 연합되지만, 회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세례가 있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로 씻음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성찬에서 떡을 먹지 않으면 잔을 마실 수 없는 것과 같다. 떡을 먹는 것이 죽임당한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다. 살아있는 어린양을 먹을 수 없다. 죽은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 장사되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회개의 마침은 죽음이다. 나의 생각, 자아, 나로부터 비롯되는 감정, 의지를 다 버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바로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죽어야만 새사람이 된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고 말씀하신다.

댓글

  1. 구원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에 달려있다.
    옛사람은 죽어야만 새사람이 된다.

    오직 생명의 문제임을 늦게나마 알게되었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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