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


(누가복음 23장 27-31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가 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게 되었다. 이미 결박당하신채 이리저리 끌려 다녀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심문을 받으시며 많은 매를 맞으셨다. 기운이 다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실 수 없게 되신 예수님을 본 로마 병사들은 가까이에 있던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하나를 붙들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구레네는 예수님 당시 이집트의 서쪽에 접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영토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고 지중해 해안 가까이 있던 그 주된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정착해 살고 있었다. 시몬은 아마도 구레네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결박을 당하신 채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 십자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호기심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그를 조롱하며 그가 죽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쫓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그가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인들도 있었다. 그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운 것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이의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과 죽음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귀한 교훈과 놀라운 사랑의 이적을 많이 행한 한 고결한 인격자가 겪는 고초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운 여인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던지신 말씀은 바로 그 여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이 말씀은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오는 여인들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머지않아 로마 군대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될 것이고 참혹한 재앙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닥쳐올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때는 참된 믿음의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의 날이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비통해하신 것이다.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닥칠 그 재앙의 날이 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고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것은 히브리 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었다. 그 반대는 그들에게는 저주받은 인생과 같게 여겨졌다. 그런데 머지않아 닥칠 재앙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피할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숨을 길도 없으며, 그 아이들을 먹일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이 겪을 고통을 참을 수도 없으며, 온 식구가 함께 그 재앙을 당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사람마다 “차라리 아이들이 없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며 아이 없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만큼 비참한 상태에 놓이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직역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이면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그런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잉태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방인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 끝에 하신 말씀 즉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신 말씀에서 『푸른 나무』는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즉시 불에 타 없어질 나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심판의 불을 이기지 못할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자신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세상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담당하며 이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물며 그를 믿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편에 서는 모든 자들이 당할 고통은 극심하기 이를 데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애끓는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관리들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했는데, 관리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모욕했고, 군인들은 그들이 마시는 싸구려 신 포도주를(시 69:21)예수님께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비웃었다. 시편 69편 21절에서『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그리고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 등을 각각 제비뽑아 나누었다. 시편 22장 18절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는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 중 몇몇은 예수님 앞에 지나가면서 그 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이렇게 말했다.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복음27:40; 마가복음 15:29~30). 유대 종교 지도자들, 군인들, 백성들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했다. 그들이 비난한 내용은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계신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서『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이 받으신 고통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이사야 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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