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17절『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다. 처음부터 빛과 어둠을 등장시킨다. 이 세상의 어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빛되심을 대비시킨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빛의 능력으로 어둠이 물러가는 그런 모습을 그려낸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그리고 1장 9-12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그러나 사람들은 3장 19절에서『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빛과 어둠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창세기1장 3절에서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은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어둠이 없는 빛이다. 요한1서 1장 5절『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그러나 세상의 빛은 어둠을 전제로 하는 빛이다. 빛이 가려지면 어둠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세상은 흑암이었다. 흑암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해주셨다. 이 빛은 물질의 빛이다. 그래서 이 빛은 하나님의 빛이 아니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빛을 비춰주시지 않고, 물질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하셨는가?
빛은 어둠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가면 어둠이 온다. 그래서 빛과 어둠은 함께 하지 않는다. 빛은 세상에서 생명이 자라고 유지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 빛은 하나님이 주신 영의 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빛이다. 그래서 이 빛은 참 빛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세상의 빛을 창조하셨는가?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빛이 오면 새하늘과 새땅이 재창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첫째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계속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는 말이 붙어있다. 이 말은 새창조의 의미를 갖는다. 안식하는 일곱째 날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어둠은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의미한다. 그 어둠을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대주의 인본주의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모든 인간들은 율법에 갇혀있으며, 인본주의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의를 이루어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율법에 의한 인본주의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자기부인의 삶은 서로 융화될 수 없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어둠에 있는 자들이 빛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라고 말한다. 빛의 능력에 의해서 어둠이 흡수되어,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46-47절에서『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은 이 땅에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잘사는 경우도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오히려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이 스스로 이땅에서 무엇인가를 해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삶을 산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어둠에 있는 자이며, 인본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던 자였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모습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생활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 이스라엘 대표로, 모든 사람들의 모델로 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세번이나 기도하러 가셨는데, 제자들이 모두 자고 있었다. 그속에 베드로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와서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제는『자고 쉬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붙잡히시던 밤에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베드로는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던 자였다. 베드로의 열심과 의지는 죽음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죽고 난 후에, 다른 제자들을 선동해서 갈릴리 바다에 가서 어부생활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베드로의 표뵨은 모든 인간들이 열심과 인간적인 의지는 결국 베드로 처럼 예수님을 따르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자기의 의지와 열심을 믿는 자들은 바벨탑을 쌓는 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성도의 열심과 결단적 의지를 칭찬한다. 기독교는 오히려 반대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간의 열심과 의지를 꺽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부활의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하는가? 새창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옛것을 벗어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왜 옛것(옛사람)을 벗어야만 하는가? 옛사람이 탐욕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본주의를 낳게하며, 스스로 율법에 갇히게 만든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여기에서 예수님은 육의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시몬)을 다시 호칭하게 된다.
갈릴리에서 있는 시몬의 모습은 흩어진 양들의 모습이다.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 시므온(흩어진 자)의 모습이다. 시므온은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자기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야곱은 시므온을 저주했다. 예수님은 마치 이러한 시므온을 상기시키라고, 베드로를 시몬이라는 호칭으로 과거의 이름을 호칭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를 보면 흩어져 소멸당해야 할 시므온 지파가 유다지파의 기업을 무상으로 받아 소멸을 면한다.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흩어진 시몬에게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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