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였으나 이르지 못하는 구원


히브리서 4장 1-2절『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구원에 대해서『쉽게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모든 사람은 죄인인데, 우리의 노력으로는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예수의 피로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따라서『믿기만 하면 천국간다』고 말한다.『이것을 받아드리고 믿으면 천국간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은1절에서『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했는데,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처럼 기쁨과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 앞의 내용은『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만든 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관계로 격노하셨다』는 말이다. 앞의 3장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이 맹세했다는 말이 나온다. 3장 18절에서『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그래서 4장에서『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기뻐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시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북을 한다. 과거에는 두만강만 넘어면 기뻐했지만, 지금은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히면 끝이다. 두만강을 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은 한국 땅을 밟지 않고서는 안심하지 못한다. 그들의 구원은 북한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땅에 들어오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히브리 백성이 살기 어려워서 부르짖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바다를 건너오게 하셨다. 주님은 홍해바다를 건너게 해서 가나안 땅에 그들을 들어가게 하시려고 했다. 홍해바다를 건너서 1년이 되었다. 매일 맛나를 먹고,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추위를 막아주었다. 1년이 지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다. 1년 전에『홍해 바다를 건너온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켰다.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히브리 백성을 내 보내지 않으므로 아홉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신을 쳤다. 바로왕은 급박해지고 열번째 재앙으로 그들을 내 보내주었다. 열번째는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밖에 발라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간다(pass over). 히브리 백성은 바로왕의 진노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인줄 알았는데, 바로왕의 진노가 바로『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려워질 때 그 어렵게 하는 자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애굽 백성이건 히브리 백성이건 어린양의 피를 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집을 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 백성들이 1년 만에 유월절을 지키면서『아,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놓임받는 것이 구원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려울 때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은 길을 열어주시고 환경은 변화될 수 있으나, 기도하는 자의 내적 변화는 없다. 

유월절을 지킨 후, 주님은 열두 지파를 뽑으라고 하셨다. 광야에서 태어난 자를 제외한 약 60만명 중 대표 12명을 뽑았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그 땅에 들어가면 죽는다. 거민이 삼키는 땅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광야에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두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열 지파 대표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을 믿고 통곡했다. 그 때 하나님이 격노하신 것이다. 주님은 가나안 땅에 함께 하신다고 했는데도 그 말을 못 믿는 것이다. 영적 눈이 닫히고 육적 눈으로 본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광야에서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다. 구원받는 회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날 시대를 사는 자들이 광야에서 히브리 백성과 함께 했다면『갈렙과 같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우리가 열두 지파를 따를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노아 때 살았더라면 아마도『방주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방주에 들어가지 않을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노아의 방주(ark)는 상자의 개념이다. 배라는 것이 없었고, 비도 내린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노아는 의롭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아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황당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성경은『아무도 노아의 말을 따를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예레미야서에『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다.『만물보다 부패한 것』의 의미는 치료가 불가능한 부패를 말한다. 

누가복음 17장 32절에서 예수님이『롯의 처를 기억하라』라고 하셨다. 롯의 가정은 소돔성의 죄를 이긴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그들(4명)을 건져주었다. 그들이 천사에 이끌리어 소돔성을 나왔는데, 주님이『내가 지시한 저 성까지 갈 때까지 소돔성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주님은 소돔성을 심판하는 것 보다 몇 안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더 관심이었다.『뒤돌아보지 말고, 머물지말고, 계속 가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구원의 확신은 정지된 것이 아니다. 롯은『거기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머물지 않고, 계속가라는 것은 할 수 없으니 가까운 성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소알성으로 바꾸어 주었다. 롯이 말한 것은 불순종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회개다. 롯은『자기를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롯의 처는 자신이 신실하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그냥 가면되지 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다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상징이 되었다. 이를 두고『시작하였으나 이르지 못하는 구원』이라 한다. 

주님은『주님을 신뢰하는 자』를 원하신다.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돌아보는 것이다. 주님이 말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주님이 말했기 때문에 지키는 자는 율법 속에 있는 자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회개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주님에 대한, 주님을 신뢰하는 변화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신다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는 성경의 좋은 귀절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비유는『열처녀 비유』였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롯의 처와 같은 상황이다. 회개하는 자는 주님을 마음으로 신뢰하는 자이고, 회개하는 자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다. 주님은 참 구원과 거짓 구원을 구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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